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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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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태 Series 12 리드하는 삶

마태복음 7:7-12

 

옛날 어떤 마을에 마늘도둑이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늘을 훔치다가 그 집 주인에게 잡혔다. 원님은 마늘도둑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일렀다. 첫 번째 벌은 마늘을 훔쳤으니까, 그 원대로 마늘 100개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벌은 곤장을 50대 맞는 것이었다. 세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마늘 도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우선 곤장 50대를 맞으려고 하니까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려고 하니까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마늘도둑은 벌로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아뢰었다. 처음 마늘을 한 두개 먹을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10개쯤 먹으니까 입안도 얼얼하고 속 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20개나 먹었다.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눈알도 빠져나오는 듯 했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그는 원님에게 마늘을 먹는 대신에 곤장을 맞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래서 곤장을 맞기 시작했다. 10대를 맞았더니 엉덩이가 터지고 살갗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15대를 맞았더니 정신이 까물까물해지고 더 이상 맞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원님에게 곤장을 맞는 대신에 벌금을 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결국 그는 애꿎게 마늘을 20개나 먹고, 곤장을 20대나 맞고, 그리고 나서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고 난 후에 간신히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생의 운명은 자신의 선택임을 보여 줍니다. 마늘을 사서 먹느냐 훔쳐먹느냐도 선택이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도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몫입니다.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길도 바로잡을 수 있고 잘 된 길도 마지막엔 굽은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빨리 가기를 원하는 것이 잘 못인가요? 좁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이 지혜입니까?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여차하면 낙오자가 되기가 쉬운데 예수님의 좁은 길로 가라는 오늘 말씀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배경이 있고 그 환경 속에 있는 문제들을 짚어 주시기 때문에 먼저 그 당시 환경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이란 고지대에 성벽을 쌓고 성안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당연히성벽을 돌아가며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문은 제일 크기에 그 길도 넓었습니다.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군들을 환영하곤 했는데 이것이 넓은 문입니다. 주로 당시의 리더들이 그 문을 통해 자신들의 위용을 뽐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런가 하면 성벽의 후미진 곳에는 바늘귀처럼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정문의 출입허용 시간이 지나 문이 닫히고 난 뒤에 꼭 성 밖을 나가야 할 경우에 그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입니다. 길도 당연히 좁고 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일명 바늘귀 성문입니다. 천민들이 주로 사용을 했지요.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으로 비유하실 때 예로 든 성문이 바로 이 바늘귀 성문입니다. 한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겨우 빠져나갈 수밖에 없어 오늘날의 밴스급인 당시 부귀의 상징인 낙타는 절대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는 아주 작은 입구였습니다.

 

어찌보면 이 말씀은 대중적인 것이기 보다는 사회의 지도층이나 리더들에게 주신 말씀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나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 말씀에 좀 귀를 기울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왜 마치 넓은 길로 가는 것을 막는 듯한 이 말씀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예수 믿는 이유가 이 넓은 길로 가길 원해서 아닐까요? 빨리 성공의 길로 가길 원해서 아닐까요? 맞습니다. 사실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며 자신을 통해 나가는 길은 언제나 성공의 넓은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로 같은 복잡한 길들 중에서 가장 빠르고 넓은 길을 주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 안에서 찾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좁은 길의 의미를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1. 좁은 길은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넓은 대로가 활짝 열려 있을 때는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그 넓은 길이 막혀있을 때 이 좁은 길은 어쩌면 풍전등화 앞의 위급한 생명의 생사가 달려 있을 수도 있고 야밤에 침입하는 적군의 기습을 성안에 알리려는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순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전염병에 걸려 죽자 이를 주변에 알리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야밤에 죽은 시신을 옮기는 슬픈 오열의 길일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불현듯 가야만 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가야하는 길은 언제나 이 좁은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통로를 이용하는 자들이 처지가 이럴 수밖에 없다 보니 이 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는 천하고 불쌍하고 못살고 3류 비류 인생들만이 통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길을 가는 환경도 안 만들뿐더러 이런 인생들과는 차별을 두어 우리는 이런 자들과는 다니는 길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소위 귀족 인식이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갑질은 수많은 을에게는 칼보다 아픈 것이었으며 세상의 그 어느 아픔의 무게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을 손수 걸어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병든 자들이나 시체나 가난한 자들이나 창녀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전통적 규례를 깨고, 스스로 병든 자들을 친히 돌보시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창녀들에게는 또 다른 삶의 길을 보이시며 남들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고 싶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르게 리드를 안 하시니깐 본인이 직접 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디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2. 인생의 삶을 계몽하기 위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의 이 교훈은 산상보훈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외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교훈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 이 모든 가르침이 결국 남들처럼 살지 말고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재벌 사옥처럼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꾸며지고 불교 사찰이 강남 한복판에 버젓이 판치고 앉아 있으면서 과연 좁은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돈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직 힘겹게 숨 쉬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을 위해 아주 조그마한 성의와 사랑을 던져 주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리는 그런 사회가 그런 교회가, 그런 성도가 지금 이 세상에 필요할까요?

 

심지어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분에 넘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아니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한 알의 밀로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딜을 하셨습니다. 의인 10명만 찾는다면 이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결국 이 구원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채 소돔과 고모라는 화염에 휩싸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넓게, 멋지게, 그리고 화려하게 산 대가였습니다. 그 안의 리더들은 전부를 몰살시키고 만 자들이었습니다.

 

3. 돌아설 수 없는 문입니다.

 

이 문에 들어가면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밖에서만 보고 집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전언에 의하면 만일 돌아서려면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알사스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9살의 나이에 철학 박사, 신학 박사, 음악학 박사가 되었다. 부귀와 영화가 눈앞에 있었고 그의 인생은 마치 고속도로와 같았다. 그러던 중, 아프리카에 의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의학을 시작하여 36살에 의학 박사를 취득했다. 37살 때 독일을 떠나 아프리카로가서 닭장을 개조하여 진료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일생을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봉사했고 그 슈바이처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쳐를 공경하고 존경하지만 한국 서울의 강남에 사는 집 아들이 슈바이처처럼 살겠다고 했다가는 부모에게 뺨을 맞는답니다. 이유는 미쳤다는 것이죠. 아니 왜 멀쩡한 집에, 직장에, 차에, 가족 다 놔두고 그런 미친 짓을 하느냐며 한마디 던지는 것이 “너 묵고 싶어 환장했니?”랍니다.

 

2천년 전, 주님은 좁은 길을 가라 하셨습니다. 그 길은 천한 길도, 저주받은 길도, 가서는 안 되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슈바이쳐가 고쳐준 환자 중에는 의사도 나왔고, 국회의원도 나왔고, 장관도 나왔고, 심지어 대통령도 나왔습니다. 자신은 고난의 좁은 길을 걸었지만 이웃은 화려한 넓은 길에서 성공을 하였고 그 중에 일부는 슈바이처처럼 좁은 길을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쳐야 말로 세상을 리더한 위대한 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텍사스에서 큰 목장을 경영하는 돈 많은 한 부자가 세계여행 중에, 그렇게 보고 싶던 버킹검 궁전 앞까지 왔습니다. 그는 문지기에게 1,000불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이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왕궁은 돈을 주고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단 1불이 없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으로는 세상을 리드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돈이 없어도, 공로가 없어도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은혜의 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알리기 위해선 그 좁은 문으로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자가 바로 세상을 리드라는 자입니다.

 

여러분, 비행기 1등석과 3등석 중 어느 좌석이 좋은 겁니까?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말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추락할 비행기 1등석이 좋습니까? 안전하게 목적지로 가는 3등석이 좋습니까? 물론 안전하게 가는 3등석이 더 좋은 비행기입니다.

 

8차선의 포장도로와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 중 어느 길이 좋은 길인가? 이것도 명제일 수 없습니다. 왜요? 도로의 질보다 행선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길이 좋은 길입니다. 명절 같은 때에 고향 가는 하행선은 꽉 막힙니다. 반대로 서울 가는 상행선을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턴해서 편한 길로 질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왜 1등석 같이 살고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왜 3등석인가?

 

성도 여러분, 편안한 길을 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바른길을 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신앙은 끝을 보게 합니다. 이 길의 행선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 앞에 섭니다. 어떤 광고를 보니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좁은 문이 연결하는 또 다른 세계는 가본 자들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을 증거해야 하는 많은 교회가, 그것을 설교하는 많은 목사들이, 그 설교를 들어 잘 알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남들이 들어가는 것은 볼 수 있을지언정 나와 내 가족은 지금도 그 좁은 문으로는 들어가길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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