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조회 수 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은밀한 삶 마태복음 6장 1-8

2018년 11월 4일 가까운교회 주일 낮 예배

 

하나님은 아주 은밀한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들리고 보이기도 하는 분들도 있다고 하지마는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을 정의하기를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한 중에 계신, 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스스로 쉽게 노출을 하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만을 은밀한 자로 살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은밀하게 살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은밀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 은밀은 몰래 눈에 띄지 않도록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을 들키지 말고 몰래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는 상을 받을 줄 생각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나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나 찬양을 하는 것도 길거리나 성전이나 강당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다 듣고 보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한 듯하지만 경건치 못한 위선자들은 사람을 향해 구제할 때도 나팔을 불고 큰 거리나 길이나 회당에서 보란 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거리나 길가, 혹은 성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심지어 중언부언하면서 하나님의 관심을 도무지 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세밀하시고 아주 미세하신 분이십니다. 작은 숨소리도 들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아우성치고 요란을 떨고 난리법석을 치지 않아도 이미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르치신 후 우리가 늘 외우며 암송했던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내용은 화려하거나 심장을 녹이거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감성적이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들으시고 주시는 자와 달라고 기도하는 자의 상호 관계성에 있어서 원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월급을 타는 날입니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월급 탔지? 꺼내놔”라고 아주 당연한 듯 말 합니다. 남편은 당신이 한 달 내내 일한 자기 노동의 댓가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꺼내 아내에게 내어놓습니다. 그날 식탁에서 가족이 저녁을 먹는데 식탁을 다 차린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저녁을 먹으라고 부릅니다. 오후 내내 한번 앉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식탁을 차렸지만, 어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너무도 뻔뻔하게 자신들이 벌어 오지 않은 돈으로 자신들이 차리지도 않은 음식을 맛있다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허겁지겁 탐닉합니다. 간간이 대화도 이어집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돈이 더 필요하니 더 좀 벌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해 보라”고 하고 자녀들은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이나, 유행하는 옷, 심지어 값이 좀 비싸지만 맛있는 반찬을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더러는 자신이 벗어 놓은 더러워진 옷을 “왜 빨리 빨래를 안 했냐”며 투정도 하고 어머니는 그런 자식에게 미안한지 벌떡 일어나 세탁실로 달려갑니다. 보다 못해 아버지가 “네 옷은 네가 빨아 입으라”고 꾸짖자 딸은 버럭 “내가 빨래하는 사람이야?” 하면서 아버지를 째려봅니다. 그런데도 이 식탁 위에선 누구 한 사람 억울한 사람이 없고 누구 한 사람 원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달래고 어루만집니다. 이것이 당연한 일입니까? 이것이 원칙이 살아 있고 공의가 살아 있으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삶의 모습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 광경은 어느 못되고, 막 되 먹은 아내와 자녀를 둔 불쌍한 가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토끼 같은 새끼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를 두고 사는 행복에 겨운 한 가장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상호 관계가 아주 건강한 가정입니다. 언 듯 보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듯한 가정이지만 사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누릴 것 누릴 수 있는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의 전형적인 행복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런 모습을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월급 탄 것 꺼내” 할 때 “그게 내가 번 돈이지 네가 번 돈이야? 네가 벌어서 써”라고 한다면 언 듯 그게 정당한 것 같아 보여도 그 가정은 그것으로 벌써 끝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등록하게 등록금을 달라 할 때 “그걸 왜 나한테 달라고 하니? 네가 벌어서 내야지” 한다면 그런 가정은 벌써 유고가정이 된 것입니다.

 

부모와 부부와 사회 결성원들 간의 관계는 물론 말해야 알고 깨닫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침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일류 축구팀일수록 선수들의 외침은 적습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작전을 은밀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합지졸에 3류 팀 경기를 보면 난리도 아닙니다. 패스해라 뭐해라, 뭐했냐 등등 시끄러운 만큼 결실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 아이들이 범죄에 물드는 최고의 이유는 자신들의 욕구와 필요가 가정에서는 해소가 안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그 생각은 부모님에게 말을 하거나 상담조차 해 보지 않고 스스로 그럴 것이다 라고 자신이 맘대로 판단한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 관심을 끌 일을 만듭니다. 주로 절도나, 폭행이나, 결석이나, 외박이나, 가출입니다.

 가정과 부모를 자신과 격리시킵니다. 그러면서 나를 망친 사람이 부모고 천하에 쓸데없는 것이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못 받은 것만 생각하고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이런 모든 일은 바로 단절이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단절은 불신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신은 다양한 역기능을 양상 해 내는데 부모 자식간에, 부부지간에, 사제지간에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 비상식적인 일들로 결국 사회 악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지 못하고 모든 불신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믿고 화려하지 않아도 신뢰하고 특별한 서약이나 조약이나 계약이 없이도 믿는 사회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것이죠.

 

자 그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얻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고 없고는 다른 말이구요. 바로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는 기도는 기도 이외에 다른 행동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입장을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은밀한 가운데 보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아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도 아시고, 나아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때와 시기를 기다리시는 것일 뿐 우리가 달라고 해서 주시거나 싫다고 해서 안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을도 안 왔는데 열매가 맺어지기를 생떼를 부리며 기도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마술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쌀도 안 씻었는데 밥 다 먹고 난 후 마시는 숭늉을 달라고 난리를 치는 것은 싹도 트지 않은 벼에서 쌀을 얻겠다는 억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은밀한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품성을 우리는 파악 해야 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의 형상과 흉상을 만드는 사람들과 다르고, 조그마한 일을 해놓고 각종 상과 기념탑을 쌓아 자랑하기 일삼는 사람들의 성품과는 사뭇 다른 점을 말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멋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멋과 품위는 은밀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우리의 관계성을 설정해야 합니다.

 

1. 신앙과 선행은 보이지 않는 네트웍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무선 인터넷 참 희안하죠? 라인을 꽂아 연결하는 것도 희안한데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를 연결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놀랍게도 가능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뢰와 믿음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은밀이란 말은 숨겨진 이란 말이 아니라 드러내어 놓지 않아도 믿는 신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행 자체를 사람들에게 상 받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사람에게 받는 것으로 끝날 문제이지만 사람에게 상을 받을 목적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먼저 상을 주시는데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도 상 받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에게 받을 상을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상을 받고 사람에게도 상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란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은밀한 가운데 거하는 선행에 대한 응답이십니다.

 

모든 구제와 봉사를 드러내어 놓고자 한다면 숨겨질 것이요 숨기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밝히 드러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행과 구제도 엄청난 자제력과 겸손과 하나님의 법안에서 해야 하기에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하니님은 이미 그런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2. 선행과 신앙의 결과도 즉 상도 동일하게 보이지 않게 다가온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상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역시 사람들 앞에서 벌주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상도 벌도 은밀하게 주십니다. 상 받는 이도 하나님의 자녀요 벌 받는 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고 공평하게 공의롭게 대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발라크”라고 합니다. 이는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 처해 있거나 그 대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서글픈 사실은 바라볼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교회협의회라는 WCC는 “인간이 지닌 모든 신앙과 믿음은 형태와 방법이 다를 뿐 모두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것들이다”라고 하여 “절의 중도, 성황당의 무당도, 점집의 보살들도 모두 하나님이 보내주신 신앙의 대상들이다”라고 정의하며 세상에 바라다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WCC는 천주교도, 불교도 무속신앙인들에게도 구원은 있다며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동참하는 교단들의 면면을 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대한 기독교 장로회, 대한 예수교 감리교, 국제적으로 보면 대다수의 교단들이 이 WCC에 가입하거나 지지 또는 동의하고 있으며 호주도 유나이팅 처치라는 연합교단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교단들이 가입하여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교회는 모든 세상입니다. 세상으로 교회 될 수 있게 하고 교회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아름답고 훌륭한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헛된 것을 바라보는 인간들을 참된 진리로부터 멀어지게하려는 사단의 계략인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교황이 구원을 베풀 수 없듯이 WCC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교황이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WCC가 성경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찬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흙속에 묻혀진 진주처럼 그렇게 은밀하게 하지만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밀의 자태며 향기며 힘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치며 온몸을 떨며 춤을 추듯 돌아다니며 난리를 칩니다. 지금도 청소년 집회를 가보면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찬양 모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광란의 상황에서 과연 은밀한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묻고 싶습니다.

 

성경을 한군데 소개하겠습니다. 열왕기 상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에게 경배하며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야가 홀홀 단신으로 바알의 450명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제사를 통해 응답하는 신이 과연 어떤 신인지 경합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은밀한 중에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은밀하게 행하시기 바랍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