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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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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태 Series 6 책임지는 삶

마태복음 5:33-37

 

오늘은 ‘더 나은 의’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맹세’문제는 ‘진실’의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맹세가 필요한 것은 신뢰가 없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물론 모든 시스템을 못 믿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진실하다면 맹세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맹세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이미 대신관계와 인간관계가 깨어졌음을 보고 생긴 것입니다.

 

문제는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은 책임을 질 수 없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대신관계에서 회복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더욱이 대인관계에서 조차 회복할 수 있는 요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책임은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 유명 야구인이 이혼 후 아내가 맡아 양육하는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깨지니깐 부자간의 관계도 깨지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자녀에 대한 부양의 책임마져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자들은 인간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고 그것은 상호 진실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맹세를 함으로 서로에 대해서 신의를 자키도록 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두 종류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맹세인 서원이고(민 30:2, 신 23:21),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맹세입니다(레 19:12).

 

구약 성경에서 서원이나 맹세는 허용되었습니다. 레위기 19: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맹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맹세를 말합니다. 사람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거짓 맹세는 안 되지만 맹세가 허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민수기 30:2절과 신명기 23:21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서원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맹세가 허용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맹세나 서원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명령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그 맹세의 율법이 거짓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맹세를 금한 말씀의 본뜻을 왜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16-22절을 보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맹세하는 형태에 따라 어떤 것은 구속력이 없고 어떤 것은 구속력이 있다고 구분하여 가르쳤습니다.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은 구속력이 없는 ‘헛맹세’라고 했고, 성전의 금과 제물로 맹세해야 구속력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금을 바치고 제물을 드리면서 맹세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래서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구속력 없는 맹세로 다른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였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거짓됨을 방지하는 도구였던 맹세가 오히려 거짓을 방조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가짜 맹세 따위는 절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격으로 하는 맹세는 근본적으로 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깡패들이 하는 맹세가 정당한 것입니까? 마피아들이 맺는 맹세가 민족과 국가 번영에 이바지 합니까? 정치인들이 철새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우리가 남이냐고 모였다가 후안무치한 놈들이라고 갈라섰다가 하는 그 모습들에서 맹세의 가치를 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눈에 보이는 이런 맹세들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을 경박하게 만드는 악의 요소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된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한 성도들 사이에는 맹세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신뢰가 회복되고 새로워지고 다시는 죄악의 백성들이 행하는 길로 가지 않는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에 맹세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못 믿어도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고 주님을 믿는 맘으로 그 사람을 믿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맹세는 아주 필요 없는 요식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이유가 “바로 우리의 보증인이 예수님이다”라는 것을 기도할 때마다 선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관계가 회복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들은 신뢰 속에서 살기 때문에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진실만 말하면 됩니다.

 

따라서 거짓 맹세로 인하여 맹세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마치 맹세에 관한 구약의 계명을 전면부인 하는 것처럼 오해하여 초대교회 재세례파들은 일체의 맹세와 서약을 금지하여 맹세와 서약을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맹세나 서약을 요구하는 직업조차도 가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퀘이커 교도들은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법정에서의 맹세조차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철저히 회복된 제자들의 신뢰성에 기초해서 하신 명령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은 회복된 자들로서 진실 된 자이기 때문에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필요가 없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맹세를 일삼는 자들은 일단 거짓과 그 삶이 전혀 진실하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조차 자신의 말과 삶에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입에 맹세를 담아 그것으로 진실성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들이 맹세를 하든 말든 예수님은 그런 자들의 맹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에게, 철저히 진실 된 관계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옳고 그름만 진실하게 말하면 될 뿐 의미 없는 맹세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서로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입니다. 요즘은 부부간에도 각서를 쓴다고 합니다. 각서를 쓰고 맹세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맹세를 하고 각서를 쓰고,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받아도 사기를 칩니다. 우리는 거짓 맹세와 거짓 계약서에 속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제자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맹세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종이에 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써 그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맹세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맹세가 필요 없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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