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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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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태 Series 4 화목의 삶

마5:21-26

 

오늘날 두 극단의 정치형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중과 집단과 체제를 중요하게 보고 개인은 언제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할 뿐 주권과 재산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전제주의 일명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뜻하는 정치형태이고

 

국가의 주권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으며 그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원칙하에 개인의 주권과 재산과 자유가 국가보다 먼저라는 개인주의 즉 자유 민주주의 형태입니다.

 

장단점은 다 있겠지만 우리 한국은 이런 양분화 된 정치체제를 남북이 각각 나눠 갖고 있으면서 전 세계의 극단적인 정치형태를 작은 한 나라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묘한 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이 두 가지 정치 형태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양분화 된 정치형태에 인류학자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을 지향하는 형태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독교 경건 공동체였습니다.

 

이 경건 공동체는 적게는 한 가족 단위로 많게는 수천 명에 의해 무려 수백 년을 이어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모라비안 교도들이나 메노나이트, 아미시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사람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은 취하고 인간이 욕심으로 갖고자 하는 것은 절제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그 다스림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원리를 가만히 보면 “욕망과 욕심과 시기와 질투의 핵심은 사람이다.”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말은 사람만 안 나서면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나서면 세상은 파괴된다는 원론적인 말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나눠주고 아껴 쓰고 함께 쓰고 바로 쓰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예절과 윤리를 실천하면서 사람의 기준이 아닌 바로 이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실행하는 그런 신국, 바로 경건 공동체가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화목했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 안에서 화목은 언제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공동체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그들은 날마다 모였습니다.

*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 매일 교제를 했습니다.

* 하나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제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빈부귀천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교통하는 관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천한 사람도, 귀한 사람도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이, 모두 공존하며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인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경건 공동체를 향하여 도데체 하는 일이 뭐냐고 묻고 비아냥거리지만 사실 이런 삶이 보편적인 삶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힘든 삶입니다.

 

매일 직장에 나가는 것보다 앉아 기도하는 것이 더 힘든 것입니다.

매일 장사하는 것보다 성경 말씀 공부하는 것이 더 힘든 법입니다.

남을 깔아뭉개는 것보다 남을 세우고 칭찬하는 것이 더 힘듭니다.

나 자신을 낮추고 남들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남을 지배하고 사는 것보다 힘듭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이 거룩한 공동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하나 됨에 있습니다.

 

32절 상 반절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생각도 다양하고 개성도 다양합니다. 뜻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의 강력한 리더십에 순종하고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과 일치라는 말은 상당히 좋은 말이지만 잘못하면 이 획일화를 위해서 개인의 생각과 개성을 말살시켜버리는 전체주의 사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어떻게 한마음과 한뜻이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권력이나 통치가 존재하는 정치형태가 아닌 자발적으로 통일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려는 성령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무조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종은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앙은 이 순종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순종의 열매는 언제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상상하지 못했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2. 물질을 나눔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32절 하 반절에서 소유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 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말합니다.

 

재물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소득에 차이가 생깁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소유에 많고 적음에 따라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계층이 생겨서 각종 사회문제로 비화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인 정치제도나 법으로는 이 소유욕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19:16-24절에 보면,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왔던 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온전해지려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소유에 연연해 하지 말고 나를 따르는 것을 너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쓸쓸한 표정으로 떠나가 버린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서 복음은 물질을 초월하고 소유욕을 깨뜨리고 움켜쥐거나 강탈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서, 이웃들의 필요를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자신 있게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너희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인을 설정해야 한다』고 하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은 적어도 물질이 우리 인생의 최고 목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7-39)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과소비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3. 복음을 나눔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한마음, 한 뜻을 가졌고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복음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실 성도 간 최대의 친목은 복음의 나눔입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같은 동호회를 다니고 같은 취미 생활을 즐겨도 그것으로는 진정한 화목을 오래 나눌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도 인간의 욕심과 이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개입되어 있으면 언제나 화합보다는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최대의 화목은 역시 복음이 주는 능력 안에서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메세지를 통해서 그들의 간증과 증거를 통해서 은혜를,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을 나보다 더 섬기는 능력을 받아 그것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경건 공동체가 설립되기 전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했는지 마태복음에 나타난 산상보훈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웃에게 저지르는 최대의 죄는 살인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웃을 향하여 욕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조차도 살인에 해당한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특히 좀 모자란 자들이라든가 미련한 자들을 향하여 조롱하는 것조차도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말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라고 고함지르는 동족들을 향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병정들을 향하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은 모르고 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용서를 빌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웃 사랑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제사에 앞서 이웃과 다툰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난 뒤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실 만큼 이웃과의 소통은 제사보다 앞선 일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내 입장에서 남이 잘못한 죄를 용서하는 일도 당연하지만, 혹시 내가 잘못 한 일이 있거든 바로 용서를 빌고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며 성도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란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르침이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려는 의도란 것입니다.

 

제가 25년 전에 호주의 백상어 그렉노만에게 골프를 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골프 실전의 능력보다는 그가 골퍼들의 멘탈을 위해 가르쳐준 말들이 더 생각나는데 지금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골프는 동반자에게는 필드만큼 넓게 배려하고 자신에게는 러프만큼 잔혹해야 한다”

 

는 것이 었습니다. 해서 저는 라운딩할 때 함께 라운딩하는 버디의 형편은 100% 수용해주면서도 불구하고 제 처지는 스스로 잘 봐주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볼이 안 좋은 위치에 가면 함께 라운딩하시는 분들이 편하게 치라고 배려해 주시지만 그분들의 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초기에 배운 그 잠언 때문에 그런지 누구도 아닌 제 스스로 벌려 놓은 그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며“지금의 1벌타를 아끼기 위해 더 큰 실수를 범하기보다는 지금 1벌타를 얻음으로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골퍼로 성장하자”라는 마음으로 라운딩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 상식인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화목공동체는 역으로 “내가 하면 불륜이요 남이 하면 로맨스일 것이다”라는 삶을 실천하는 동공체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중요한 것처럼 남이 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인식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 몇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1. 남은 언제나 나보다 낫다.

2. 남은 언제나 내 섬김의 대상이다.

3. 남은 내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다.

4.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5. 즉시 버려야 할 가장 못된 남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나다.

 

이렇게 살면 내가 살아야 할 길이 열립니다. 물론 이웃을 위한 삶이 평탄한 삶은 아닐 것입니다. 고될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허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것이 그런 삶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교회 성도들도 그런 화목을 이루는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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