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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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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태 Series3 증인의 삶을 사는 성도

 

하루는 아기낙타가 엄마낙타에게 질문합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발가락이 세 개나 되나요?” 엄마 낙타가 대답합니다. “사막을 건널 때 부드러운 모래 더미 위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있는 거란다.” “그럼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요?” “사막을 건너는 동안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그럼, 등에 혹은요?” “그건 건조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멋져요, 엄마. 큰 발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긴 눈썹이 있어서 눈에 모래도 안 들어가도, 혹이 있어서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으니까요. 근데 엄마,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요?”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입니다. 아름답고 멋지지만 그것과 아무 필요 없는 세상에서는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교회는 일반적으로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소 복음과는 다른 양상을 가지고 발전해 왔습니다.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이바지하는 것은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어 건강을 보장받는다든지, 재물을 보장받는다든지, 바라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복신앙적 신앙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을 제외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기복신앙입니다. 복을 빼면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명 미신이죠.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 할 한국기독교가 타락한 미신 종교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격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가정은 깨지는 일들이 빈번했고

교회 안 성도들과의 친목은 도모하면서도 가정에서의 가족은 불화하는 사례가 늘었으며

교회 목사의 말엔 순종하면서도 가정에서 부모의 말엔 불순종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결코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안 믿는 세속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가 원수보다 더 미운데 교회에 나가겠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우리가 모이는 이런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교회보다 중요하고 여러분이 만든 가정이 교회보다 중요하고 그런 가정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교회보다 중요하고 그런 사회가 모여 만든 국가가 교회보다 중요하여 그들을 바르고 안전하고 건전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곳이 바로 지금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해서 제사드리는 곳이 아닌 훈련소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여러 성도들의 가정들이 자신들의 집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곳이고, 성도들이 자신들의 차를 살 수 있도록 돕는 곳이고, 성도들이 재물에 부족함이 없도록 부자되게 하는 곳이고, 성도들이 건강하게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살도록 협조하고 협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집을 팔아 교회로 가져오는가 하면 교회에 비호감을 갖는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까지 마귀로 호도하면서 가정을 짖뭉개는 현상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에 잘하면 복 받는다는 그런 현혹에 미쳐버리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요. 삶은 팽게쳐 버리고 교회가서 살고, 돈이란 돈은 몽땅 교회에 바쳐버리고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교회에 정신이 팔려 다니면 그것이 최고로 신앙 좋은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배우자나 가족이 있으면 전부 마귀라고 하고 그러니 교회가 성장을 안 하고 배깁니까? 그러니 교회가 돈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번 돈으로 지은 교회를 어떻게 남을 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자식에게 줘야죠. 첫 단추 잘못꿰면 다 잘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도 그런 교회가 아름답습니까? 그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이상한 기현상을 만들며서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의식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바로 잡아주지 못하고 처음부터 잘 못 된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제부터라도 잘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진정한 아름다운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도하고 가르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치병 소녀가 병상에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출석하지도 못하고, 전도와 봉사 등의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과 성도들이 심방을 왔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알게 된 목사님이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자매님,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밖에 나가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해야죠. 하지만 자매님의 형편으로는 그럴 수 없음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대신 기도하십시오. 병상에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예배도 드리고, 기도로 전도도 하고, 기도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마을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교회에 안 나올 것 같았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교회에 나옵니다. 한편 소녀는 부쩍 교회 상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누가 새로 교회 나왔는지 캐묻습니다. 수개월 후 안타깝게도 소녀는 회복되지 못한 채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소녀의 베개 밑에서 56명의 명단이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그 앞에 붉은 십자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병상에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복음이 증거됐겠지만 그 기도는 소녀에게 하나씩 응답되어 소녀에게 최고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배후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슬프지만 진정 아름다운 모습아닙니까? 헌금을 못해도, 교회 출석은 못해도, 전도도, 봉사도 아무것도 못해도 사람의 생명을 구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럼 성도들의 아름다운 자태 중 증인들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증인은 사실을 바르게 아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고 예수님께 직접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너무나도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었고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못 만나보셨죠?

여러분 예수님과 대화는 해 보셨습니까? 못 해 보셨죠?

저도 못 보고 대화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경에 나타난 증인들의 전파로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 바울 등 예수님과 함께 살았었던 증인들의 사실적인 증거들을 믿고 신뢰했기에 내 눈에 예수께서 보이지 않으셨더라도, 내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지 않았더라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는 못했어도 본 것이나 다름없고 대화를 못 배 봤어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해서 나도 증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내 말도 행동도 매우 중요한 것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일과 믿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증인의 삶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세상 사람들이 보는 예수님의 입장과 신뢰도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증인이 될 만한 능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박해와 고난을 받자 모두 도망하고 욕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기는 알지만 박해와 고난에 맞서 그것을 전 할 수있는 힘과 능력과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담대함과 용기와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부수고 깨트리는 파괴력이나 공격형 신무기가 아니라 인격과 확신과 강한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 위해 목숨을 버리듯 성령의 능력만 받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과 힘을 받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런 권능을 주셨을까요. 바로 복음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될 우리들에게 세상을 다스 릴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다는 것을 강도 높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권세를 가져야 우리는 이 세상을 정복 할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권세로만 이길 수 있고 성령의 권세로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증인은 삶이 정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대부분 비교적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악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남을 믿지도 않고 순수한 마음도 없기때문에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비교적 착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도 믿고 교회에도 옵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평신도로 있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심각한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면 그 교회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교회가 이상한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이미 많은 지도자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욕심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국운이 다되고 멸망하기 직전으로 정말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상을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구약의 재판관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지도자들로서 공의를 행하며 정직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인데 뇌물이나 삯이나 돈을 받고 양심을 팔고 하나님께서 주신냥 거짓 평화를 선언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이익이나 세상의 행복을 취하기 위한 저질 미신으로 전락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절대 아름답지 못한 추한 모습으로 변모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4) 증인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구 소련 스탈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시베리아의 한 수용소에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수용된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건강 진단이지만 사실은 의사의 권위를 빌려 모든 사람을 강제 노동현장으로 내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병에 걸린 사람을 건강하다고 허위 진단하면서 양심의 갈등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다 어느 중환자로부터 복음을 듣게 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평안한 모습으로 오히려 자기에게 질문하는 것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사람이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는 겁니다. 결국 그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자 구원의 기쁨이 넘치고 담대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를 만나 진단하다가 암환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동 현장으로 보내지 않고 정성을 다해 치료해 줍니다. 그 젊은이는 묻습니다. “선생님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실텐데 어떻게 저를 이렇게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질문 앞에 의사는 담담히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바로 그날 밤 그 의사는 수용소 간수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됩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젊은이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유명한 소련 작가 솔제니친입니다. 만일 그날 밤 그 의사가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솔제니친은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증인은 불의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이 돈을 좋아해서 뇌물을 받고 매수가 되어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은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서 거기 굴복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증인’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말튀스’인데 이 단어가 나중에 영어의 순교자 (martyr)라는 단어로 굳어집니다. 바로 증인이라는 말에서 순교자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내가 아는 것을 바르게 말하는 것이 증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 연약하다. 너무나 쉽게 신앙을 포기해 버리고 너무나 쉽게 다른 복음을 따르고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계셔야 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물며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증인이 필요하고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알 때까지 진리를 알 때까지 예수님을 믿게 될 때까지 인내하고 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성도는 죽어서 예수를 남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기 보다는 먼 미래를 보면서 예수의 제자들을 예수의 사람들을 키우란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교회가 사람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돈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돈보다 귀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사람이 주는 돈은 아주 위험하고 도움이 아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을 잘 키우면 돈을 이기며 사역하지만 잘 못 키우면 평생을 돈타령하며 살게 됩니다. 추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증인의 삶을 살고, 교회는 제자들을 키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성도, 아름다운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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