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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2018.06.05 12:46

돌밭 같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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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시리즈를 시작하며 정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씨앗은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씨앗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틈도 파고들 수 있고 영양분이 전혀 없어 보이는 바위에서도 양분을 취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의 생명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생각해 볼 돌밭과 같은 마음도 돌밭에 뿌리를 내리고 들어가야 할 씨앗을 염려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져도 그 씨앗이 싹트지 못하게 하는 돌밭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돌밭과 같은 마음이라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 그대로 돌 같은 성질이 가득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밭에는 쉽게 풀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무도 없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싱그러움과 청청함이 없습니다. 이유는 뿌리가 내려도 태양의 뜨거움에 불처럼 달궈진 돌들이 뿌리를 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돌 틈을 파고 들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물론 시간이 흐르다 보면 이 돌밭에도 뿌리를 내리겠지만 몇 년이 걸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성격에서 나타나는 돌밭과 같은 마음은 무엇을 정의하는 것일까요?

 

1) 뿌리 없는 신앙을 말합니다.

 

신앙의 뿌리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역사와 경험과 체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나, 소문이나, 유언비어를 통해 신앙을 잃거나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크리스천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뿌리 없는 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수님 살아 계셨을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메시야로 생각하고 열렬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기적 신앙, 축복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의 단계까지 신앙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6:26)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무리들’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신앙은 기적이나 은혜를 보고 믿으며 축복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항상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필요한 것을 받는 초보 신앙이지만 점진적으로 자라나 이웃을 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더 헌신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는 어떤 시련의 폭풍이 몰아쳐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축복만을 생각하는 단계에서는 시련이 오면 뒤돌아서거나 곧 배신하고 맙니다.

 

이는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물질이나 가문이나 외모나 상대방이 가진 조건을 보고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상대방이 가진 그 무엇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작은 시련에도 곧 갈라서고 맙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사랑으로 깊어진 사랑은 어떤 시련이 와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상호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배부르기만을 원하는 무리입니까? 병 고치기만을 위한 무리입니까? 아니면 어떤 시련이 와도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제자들입니까?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잘 모릅니다. 겨울의 찬바람이 불면 푸른 소나무의 진가가 드러나듯 시련의 때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시련이 닥쳤을 때 그 시련의 문제해결은 그 사람의 관계의 정도에서 해결이 됩니다. 홀로 사는 사람은 넘어져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이나 친구가 많은 사람은 언제나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큰 나무들 중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입니다. 무려 그 높이가 100m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뿌리 깊이가 2-3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데도 어떻게 이렇게 큰 높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대신 이 나무는 그 뿌리가 옆으로 뻗어 있는데 25m에 달하며, 여러 나무들의 뿌리들이 서로 굳건히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호주에 사는 나무들도 땅이 단단하여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없어 옆으로 펴져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뿌리가 견고해야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혼자 신앙이 깊어 홀로 독야청청하는 깊이도 좋지만 함께 사랑으로 엮여 주변을 아우르는 폭을 넓히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사람들의 부족한 뿌리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뿌리는 반석이신 주님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까? 주님에게 내리는 뿌리는 바로 이웃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려야 할 뿌리의 마당으로 이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밭은 그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돌밭은 그런 천국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3) 마음속에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한국국민은 한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한이 많다 하여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암의 원인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대부분 최소 3년에서 최대 8년 사이에 큰 마음의 병을 겪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사업 실패나 사별이나 화병 등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이 신체적인 이상을 일으키고 우리 생명을 단축시킵니다.

 

한국인들이 잘 걸리는 병중에 화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명 한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서 열이 나며 마음이 분노로 가득한 병입니다. “화병은 분노의 억압에서 기인하는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자기감정 표현을 잘못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이 강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지 무조건 막으면 어느 곳에선가는 반드시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 대화하는 것을 보면 불안합니다.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억눌렸던 물이 갑자기 터지니까 그렇고 자기 느낌을 표출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분노가 쌓여 있는데 이것을 무조건 성내지 마라, 참아라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잘’ 내야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해소입니다. 분노는 자기 보호 장치이며 리크리이션 과정입니다.

 

인간의 발달 과정을 연구했던 심리 사회학자 중에 에릭슨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만 한 살 사이에 형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뢰감’이라 하였습니다. 신뢰감은 부모와 아기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배고프거나, 쉬를 했거나 불편할 때 아기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합니다. 이 사인에 대해서 엄마가 사랑으로 응대해주면 신뢰감이 형성됩니다. 세상은 믿을만하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이 단계에서 엄마의 정성 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서 불신을 갖게 되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한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한이 많은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신뢰감이 떨어지고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기가 어려워집니다.

 

부부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들이 있어서 그것을 정당하게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부부란 파트너의 필요나 요구가 접수되면 즉각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무늬만 부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부부는 서로에게 한으로 남아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리고 더 이상의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 자녀들에게까지 형식적인 부부관을 심겨주어 그 자녀들에게도 가정의 심오함을 가르쳐 주지 못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만성적인 유고가정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자녀들은 어릴적부터 인식하지 못한체 한을 갖게 됩니다.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단절, 부모자식간의 사랑 결핍, 부모 자식간의 균열은 결국 신앙으로까지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의 불안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그로부터 오는 풍성한 축복과 감사와 그 황홀한 열매를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돌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4) 패배감과 무기력

 

많은 실패나 좌절을 겪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부정적인 자아상이라는 바윗덩어리가 생깁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때 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전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보고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본 10명의 정탐군으로써 “시나무 떨듯 벌벌 떤”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는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노예 생활과 실패로 인해 자존감이 없어지고 부정적인 자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어도 이런 실패의 바윗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에게도 신뢰가 없는 사람은 남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못하는 일을 네가 어떻게 해? 라며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패배감과 무기력은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바위에서 생수를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돌밭 같은 마음도 옥토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를 쌓고,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내 맘에 깊이 뿌리내린 한과 원망, 불신, 패배감, 무기력함으로 메우고 있는 그런 돌들을 하나씩 걸러 내버려야 합니다. 그런 돌들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단 한 순간도 의미와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에는 천국의 기쁨과 풍요가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 천국의 풍요가 지금 이 땅에서 왜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그것은 이 땅에서 가정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인간의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도 미리 간을 본 사람이 맛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지옥을 이루면 천국의 소망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의 모든 픙요와 아름다움을 우리의 삶 속에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맛보고 사는 인생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있는 돌밭을 다 걷어내고 삶을 천국을 통해 다가올 천국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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