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2016.09.16 14:38

폼나는 인생 무관심

조회 수 7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무관심

누가복음 10장 25절-37절

2016년 9월 11일 골드코스트 가까운교회 주일 낮

 

이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선행 예화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선행은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발의하여 이미 미국 법원에선 “선한 사마리아 법”이라는 특수한 법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이익이나 개인의 목적을 갖지 않고 남을 돕다가 행한 실수나 행동은 법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입니다.

 

이렇듯 성경에 나온 이 예화는 지구촌 사람들이 서로 남을 돕고 이웃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것을 본받고 닮아 가기에 너무 좋은 영향을 주는 가치 있는 모든 종교의 귀감이 되는 대표적인 예화입니다.

 

사실 이 예화는 다소 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이 예화가 주는 의미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예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관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왜 강도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고는 언제나 느닷없이 갑자기 이유 없이 다가옵니다. 병이나 질환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됐느냐”가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처해진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일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의 위기는 현재가 아니고 내일이 더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위급한 처지에 있는 강도 만난 사람에겐 강도 만난 이후 두 번의 불행이 더 찾아옵니다.

 

바로 첫 번째 발견자와 두 번째 발견자가 그냥 지나쳤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빨리 살아 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는 것에서 아주 절망 속에 빠질 뻔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자를 구제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자들의 신분을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 이었다는 점과 구원한 자가 무시당하고 조롱 받던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에서 오늘 성경의 예화 의 초점은 둘로 분리됩니다.

 

이 예화는 분명히 만연된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종교적 형식과 외식성에 대한 고발과 예수께서 오신 후 복음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를 보여주는 계몽의 의미가 복수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이 예화를 왜 했겠느냐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면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 사람을 세상이 자비를 베풀고 돌아보는데 교회는 그냥 지나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구제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교회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곳이지 사람을 위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기독교 전반적인 기조라는 사실이 너무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초기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이든 전해주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은 너무 가난하고 부패하여 이웃을 생각하고 나눠주고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살지도 않을 때 그런 세상을 교회가 다 변화시켜 놓고 이제와선 너무 어처구니 없게도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구제하고 돌보고 선행을 베푸는지 모릅니다. 교회만 욕심으로 뭉쳐져 이상한 행동들을 일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종교가 주는 예전이 사람을 살리는 구제보다 앞서버렸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처해진 자가 제일 먼저 만나자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집행하는 자로써 율법적으로 시체나 피를 만지면 안 되는 신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나 거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피 흘리며 죽어가는 불쌍한 자를 구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분이 주는 당위가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관심의 초점이 현제 길에 쓰러져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 먼저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도 만난 자들을 보고도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그 당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력 능력 자격 등 골고루 다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시시한 사람들이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외형적인 자격은 다 갖춘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개인의 관심사입니다.

 

아무리 그런 사람들도 개인의 관심사가 이웃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어 남을 바라보지 못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주일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차에 치인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쳤다면 그 사람은 목사로서의 핵심가치를 잃고 목회를 하는 사람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보지 않고 환자의 경제적 능력을 먼저 본다면 이 역시도 의사로써 진정 가져야 할 가치의 핵심이 없는 의사입니다.

 

정치가가 국민은 눈에 안 들어오고 권력만 탐하게 되면 국민을 사랑하기는커녕 국민을 향해 총을 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성직자와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개인의 관심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길을 가도 무슨 생각으로 가고 먹어도 무슨 생각으로 먹고 돈을 벌어도 공부를 해도 무슨 관심으로 하느냐입니다.

 

유교에서는 중용이란 말로 무관심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이 속편하고 폼나 보이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인생사에 얽히지 말고 아무 관여도 말고 혼자 속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은 무관심을 가장 잘하는 짓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관심을 잘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증거입니다.

 

관심을 갖는 그 순간,

 

돈 들어갑니다.

시간 들어갑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귀찮게 합니다.

끝도 한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갖어야 할 자세라는 것입니다.

 

좀 누가 아프다면 관심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신경 좀 쓰며 삽시다.

누가 안 보이면 왜 안 보이는지 적극적인 관심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이 세상은 나만 잘살면 잘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또 남들이 악하다고 같이 악하게 살아서도 안 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불행한 처지에 빠졌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여러분이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누구나 사고는 이유 없이 예고 없이 갑자기 옵니다.

그렇게 폼 나게 무관심하게 얼마나 잘 살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가장 잘 사는 것은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나라는 높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남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나 쓰기도 모자란 돈이지만 그것까지라도 남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에선 그런 자를 부자라고 정의합니다.

 

받은 것 없어도, 줄 이유가 하나도 없어도 그를 향하여 관심을 갖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아픔을 갖고 나온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존심도 있고 하니 프라이버시 침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하고 지나치는 것도 일종의 매너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들어가는 비용만이 아닌 장차 들어갈 비용까지 부담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부담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나 혼자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안일함을 버리고

귀찮은 이웃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거룩한 이웃이 됩시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