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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2016.09.16 14:34

이제는 일어 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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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11~ 14절

제목 : 이제는 일어 납시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근본은 신(神)을 위해 존재 합니다. 신(神)을 위해 인간이 희생하고 신(神)을 위해 인간의 재물을 드려야 합니다. 신(神)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거나 신(神)이 인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神)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神)은 우습게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바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없는 신(神)을 만들어 민심과 연약한 자들의 몸과 맘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신(神)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신(神)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얻기보다는 빼앗기는 편에 가깝습니다. 복을 받는 다기 보단 복을 받지 못한다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반만년동안 그런 사기에 정신과 재물을 빼앗겼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의식과 정신이 잘못 인식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신에게만 잘 보이면 복을 받는 다는 기복사상입니다. 그리고 이 신은 대부분 인간이 좋아하는 물질을 좋아해서 그 신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은 엄청난 재물을 가져다 바치는 것입니다. 이 만고의 잘못 된 신관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도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복 받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은 지금도 수없이 많은 신(神)들을 만들어 내고 그 앞에 절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기독교방송을 청취하다가 “쨍하고 해뜰 날”을 부른 가수 송대관씨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기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중이었는데 결국 “무협의”를 선고 받아 무죄가 입증 되었다며 기뻐했고 출석하는 새 에덴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속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간증 중에 송대관씨는 “지난 주 좀 큰돈이 들어와 십일조를 두둑히 넣었더니 이번에 무혐의 판정이 나오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언듯 하나님이 돈 받고 죄인의 죄를 무죄로 만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웃자고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그런 의도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입장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 받고 무죄로 만드시는 이도 아니지만 돈을 안 내놓았다고 죄 없는 자를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넣는 분은 더더욱 아니십니다. 한극을 대표하는 중형가수의 입에서 아무리 농담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고 그 가치를 재물을 받고 그 대가를 베푸는 신으로 폄하한 것은 아주 중대한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같은 교단과 같은 학교의 선배로써 “그래도 한국의 대형교회 중 하나인 교회로써 자리 잡은 교회인데 부디 성도들 잘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정중히 편지를 섰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청빈하게 살아야하므로 청빈낙도의 차원에서 가난하게 살고 세상에서 주는 기쁨과 쾌락 등은 멀리하고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이 그렇게 많아?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집이 그렇게 좋아?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그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녀?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의 모든 자유와 기쁨과 쾌락과 부귀와 영화를 전부 누리고 살길 원하십니다. 그 모든 것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보편적인 은총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란 믿음의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모든 분야에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탁월한 모습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안 사는데 성도들이 허구한 날 돈 문제로, 이성문제로, 술 문제로, 단정치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고 성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욕심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너무 욕심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주시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을 일삼았습니다. 은혜를 베푼 하나님께 바로 배신을 안겨주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전염병과 기근과 무식으로 인간같이 살지도 못한 한국 백성들을 세계각국의 제자들을 보내어 잘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살려 놨더니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의 정 반대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름다운 가정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순수하고 자애롭기 그지없던 지난 날 우리 어머니들의 형상은 간데없고 생면부지의 남성들을 상대로 윤락 아르바이트에 나섰던 주부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그 중 절반이 기독교인이랍니다.(경향신문, 10월 29일 2면, 사설, 2001)

 

어린 청소년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성인들과 공공연히 원조교제를 나누는가 하면(경향신문, 9월 7일, 사회면, 2001) 일부 유명 연예인들이 일명 스폰서라는 미명하에 재벌 급 인사들과 매춘을 일삼았는데 그 대가로 받은 돈이 당사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소속 회사의 운영 자금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그 소속사 사장이 교회 장로라는 겁니다.

 

인터넷 채팅 등을 통해 어린 청소년들과 성매매가 성업 중인데 이런 곳을 이용하는 자들 중엔 변호사, 검사, 고위층 정치인들도 많지만 목사, 장로, 집사들도(민주신문, 4월 28일, 29면, 2002) 허다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젠 한국뿐만은 아닙니다. 미국은 요즈음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드러나는 충격적인 성추행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순결과 성결의 상징인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사건입니다.

 

보스톤 AFP연합 소식에 따르면 지난 2002년 1월 보스턴 대교구의 존 거간 사제(66)가 열 살짜리 소년을 성추행 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은 것을 시작으로 매사추세츠에서 활동해온 존 조헌이라는 이름의 사제는 무려 130명 이상의 아동을 성 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달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국 성인남성의 70% 이상이 알콜 중독이며

초등학교 학생 중 사소한 일을 참지 못하고 유혈 다툼을 경험한 아이들이 20% 이상이며

여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낙태를 경험한 여학생이 5%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제 미국의 전역에서는 사제들의 소년 성추행 파문이 예삿일이 아닌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경향신문, 4월 10일 국제면 2002) 미국 내에서만 교회나 성당의 성직자들에게 성폭행 당한 자들이 모여 결성한 법인체만도 200여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은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들이 살아 온 사회에는 늘 이런 현상은 있어 왔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썩을 대로 썩고 부패 할 대로 부패한 이 세상 속의 성도들의 삶을 더 이상 이대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며 성도의 삶의 각성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신령한 영성의 부흥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1. 지금은 깰 때이다.

 

바울의 첫 외침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잡니다. 자지 않고는 살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는 이유입니다. 왜 자는 겁니까? 그것은 자고 일어나 바른 삶을 힘 있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악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잠 그 자체가 좋은 겁니다. 자고난 후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할 의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 지독한 것은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좋아 하지 않고 잠을 계속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눕자 좀 더 자자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빈곤이 강수처럼 몰려 올 것이라고 경고 합니다. 이 게으름이 악한 것임을 아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잠에서의 일어남은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긴 밤을 따스하게 해 준 이 달콤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잠자리에 무시무시한 독사나 엄청난 독을 품은 왕거미가 들어왔다고 가정 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까? 아마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놀라 후다닥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일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마치 이불속의 독사나 독거미처럼 지금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독이 너희의 몸을 물기 전에 빨리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자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휴 살았다” 그러나 좀 전엔 그곳이 자신이 젤로 행복하게 여겼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가 아니면 살맛이 없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사실 죽을 자리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죽을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자리가 자신의 제일 행복한 자리라고 믿는지 모릅니다.

 

2. 빛의 갑옷을 입자

 

두 번째 외침은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마다 입는 옷이 다릅니다. 잠자리에서는 잠옷을, 학교 갈 때는 교복을, 수영장엔 수영복을 입고 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성도들은 즉시 그 시간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성도를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과 풍요와 평화가 아닙니다. 수많은 유혹과 번민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치려니 너무나 허약하고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물질로는, 지식으로는, 경험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해결책으로 우선 빛의 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갈아입는 다는 것은 빨아 입는 다거나 속옷 위에 겉옷을 입듯 내 옷 위에 더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입었던 모든 옷을 완전히 남김없이 벗어 버리고 빛으로 지음 받은 새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것이 아닌 완전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빛의 새 옷은 어떤 옷일까요?

 

1) 하나님을 상징하는 옷

 

우리가 양복을 입고 수영장에 가지 못하고 수영복을 입고 스키장에 갈 수 없듯이 입은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옷깃에 십자가 모양의 빼지만 달고 다녀도 행동이 조심스러운데 우리가 입은 옷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 될 것입니다. 빛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 할 수 없다면 그 옷이 진짜 빛의 옷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2) 악의 유혹과 공격을 방어하는 옷

 

빛은 절대 어둠과 혼합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빛의 갑옷은 어떤 유혹과 미혹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방어해 줍니다. 모든 악은 어둠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그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둠의 세력에게 무참히 당합니다. 그러나 빛의 갑옷은 그런 어둠을 밝혀 주므로 방어해 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사람들의 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의도와 숨은 악의를 알게 해 줍니다. 전쟁에서 장수들이 입은 갑옷은 적의 공격과 창칼에 몸을 보호해 줍니다. 그처럼 빛의 갑옷은 어둠을 물리쳐주는 아주 훌륭한 옷입니다.

 

3) 성도의 자태를 나타내는 옷

성도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이 옷은 우리로 하여금 단정하게 하고 방탕과 호색을 멀리하도록 하게 합니다. 이 옷을 입고는 절대 호색하고 술 취하고 방탕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일에만 몰두하게 하고 세상의 더러운 일에 몸담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모든 것을 우리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하여 잘못 활용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난 인류의 타락을 가져 왔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탓하기에 앞서 이젠 우리 모두 영적 각성을 위해 스스로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려야 할 때입니다. 미련과 아쉬움으로 쥐고 있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버리기가 아깝다고 빨아서 해결 될 것이 아니고 새것으로 가린다고 해서 해결 된 문제가 아닙니다. 과감하게 바꿔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제안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새 옷, 빛의 갑옷을 여러분 앞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바꿔 입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느냐

아니면 더러운 의복에 묻혀 어둠의 세력이 던져주는 알량한 쾌락을 개처럼 받아먹고 사느냐

양자 간에 결단 하실 때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결단에 하나님의 간섭과 관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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