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조회 수 5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팔복강해 10

예수님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

마태복음5:1-12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반 기독교적 세력에 의한 육체적인 고통 등 물리적인 고통이고

두 번째 의미는 친 기독교적 환경에 거하면서 기독교 사상을 계몽주의적 사고로 전달하여 영적으로 혼란케 하는 고통입니다.

 

이미 우리는 지난 주간에 주기철 목사님의 생애를 통하여 첫 번째 고통의 의미는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친 기독교적 환경에 살면서 기독교 사상을 계몽주의적 사고로 풀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지를 살펴보며 팔복강해의 열 번째 강해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성경 역사의 시작인 구약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은 사실 근동 주변 국가들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 이스라엘 주변국의 강대국들에 관한 이야기들로써 결코 세계사적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계를 대표하는 지역은 아니었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이 양분하여 세를 과시하는 것처럼 구약의 지리적 위치는 세계를 주름 잡았던 중앙 무대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이러한 문제를 집요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1

 

오늘날 과학과 고고학의 발전으로 이젠 과거 풀지 못했던 원시 시대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 오차 범위 내에서 거의 사실에 가까운 사실 파악과 모습 복원이 가능해 졌습니다. 그래서 수메르의 점토판이나 이집트, 그리스 등 이스라엘 주변 강국들의 신화와 전설들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성경과 흡사하여 역사가 더 오래된 이들의 신화는 훗날 성경을 기록하는 자료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다른 문화의 신화나 전설을 차용 편집하여 만든 것이 확실하다.

 

문제 2

 

하나님이 천지와 사람을 창조할 시기를 아담의 족보로 환산하여보면 지금부터 약 6천 년 전인데 당시 중국은 그보다 2000년 전인 8천 년 전에 갑골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고, 다양한 인류 문명이 싹트고 있었으며 서남아시아에서는 천문과 지리를 관측을 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탄소측정에 의하면 현재 10만 년 전 동물의 DNA와 화석만도 수백점이 수집되어있는 이 상황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제서 천지를 창조하고 심지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문제 3

 

당시 문화적 수준으로 치자면, 이스라엘 주변 강국이 그리스,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이 미국과 같은 존재라면, 이스라엘은 변두리의 약소국에 불과 한데 힘이나 정보나, 기술의 축척이 없었던 나라다. 그런데 그런 힘없는 나라의 서민들에게서 나타나는 불변의 특징은 신화와 전설을 의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신앙과 성경은 현실을 딛고 넘어서기 위한 샤머니즘의 범주에 속한 부산물일 뿐이다.

 

문제 4

고대 한국도 제사장이니, 천군이니 하는 직업군들이 있어 서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고 서민들은 그런 신탁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맹종하였다. 그런 지도자들은 신에게 바쳐지는 물질들을 소유했으며 그것으로 엄청난 부와 힘을 쌓았다.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도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제 5

 

성경에 나타난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인 신화들은 성경이 쓰여 지기도 전에 기록된 수메르 점토판에 나와 있다. 다만 성경은 그것을 복사하되 등장인물과 주인공 등을 조금 각색 했을 뿐이다.

 

문제 6

 

하나님과 일방적인 계약했다는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어이없는 편파적인 계약과 아집으로 주변 강국들인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와의 전쟁에 패하며, 긴 세월을 노예로 끌려가 미래가 없는 생활을 한걸 보면 뭔가 석연치 않고 이상하다. 그것에 뭔가 하나님께서 계획한 뜻이라는 의미를 만들어 붙이려는 시도는 그동안 인류가 축척해온 지식과 기술을 버리고, 고대 전설과 신화를 숭배하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발상과 마찬가지이며, 슬기롭지 못한 맹종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 사람들에게는 신적 존재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자 이상의 문제들은 현대 신학이 가져다 준 핵심적인 고민입니다.

현대신학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좋은 사람에게도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도 엄청 고통스런 아픔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의 이유는 우리가 여기에 대항 할 만 한 학구적인 결과를 내어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윤리와 도덕으로 풀어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근접 할 수 없는 깊은 생각과 역사관을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고 답답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1. 신앙은 논리와 체계에 무너지면 안 됩니다.

신앙도 인생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뭐든지 이해가 된다면 인생은 쉽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은 비논리로 뒤 덥혀져 있습니다.

온갖 부조리, 부정부패, 청탁, 배임 등 그건 무엇으로 성명할 것입니까?

왜 그런 겁니까?

그것이 설명이 가능합니까?

아니죠.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이치에 맞을까요?

요즘 묻지 마 범죄가 설명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비논리로 맞서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를 가리려는 유치한 시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 할 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전쟁은 이유도 없이 참가하는 전쟁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누굴 위한 전쟁인지, 이런 개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차마 입으로 말 할 수 없을 만큼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왕은 언제나 그런 죽음의 사지 속으로 백성들을 몰아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아픔도 못 느끼는 그런 사회요 국가였습니다. 그런 나라와 사회 속에서 일상처럼 늘 벌어지는 전쟁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서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고통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 주시면서 나라와 나의 가치와 의미를 비로서 되새기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 죽음도 있었고 이해가 되지 않는 살육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무엇이 해방이 무엇인지, 독립이 무엇이지, 열국 속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위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종국에는 우리를 살리 실 왕은 누구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여 영원히 지지 않고 승리하고 영원히 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순간의 승리가 아닌 한 순간의 평화가 아닌 영원한 승리와 평화를 주시려는 의도만 알 뿐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길로 가기에는 많은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2. 이해가 아닌 순종이 필요 합니다.

 

여기에서 순종이란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 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맹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이 의지적인 순종이라는 것은 대항 할 의지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 하여 성공한 사람이 역사적으로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종의 고통역시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답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끝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럼 한 가지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무언가를 거져 받을 만한 존재인가요?

아니죠?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죠? 그럼 인내는 기본입니다.

그러니 따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먼저 따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져 볼 만한 처지인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보다는 순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은 소망을 심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며 포기하지 않는 오늘 이 시간의 귀중함을 선언했습니다. 소망은 그 만큼 귀중하면서도 사회적 조롱과 질시와 비난을 받게 마련입니다.

 

노아는 120년간 산에서 배를 짓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았을까요?

아마도 우리들은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도 않는 미래의 자손에 대한 꿈을 갖었습니다.

 

그런 꿈들은 막연하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런 꿈들은 고통이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눈앞의 만족이 소망이신 분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당장 필요한 것 때문에 눈이 충혈 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것입니다.

 

하루를 단위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천년을 단위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시야를 갖은 사람들과 세속의 시야를 갖은 사람이 대화를 하게 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시야를 갖은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개인적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의 싸움인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언제나 외롭고 힘든 고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언제나 그렇게 싸워서 이겼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의 고통의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장도 아니고 싸움도 아닙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심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 자들입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