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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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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 9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1-12

 

요즘 IS의 군사적 테러로 말미암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매우 긴장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죽이고 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IS의 존재감과 능력을 과시하고 많은 이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비단 IS 뿐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1차적인 것은 일제의 만행이었고

2차적인 것은 북한의 만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종교심이 방해가 된다고 보고 국민의 신앙을 말살하려는 잔인한 정책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우월감을 내세워 모든 한국 내 백성들에게 이름을 일본 명으로 바꿔 부르게 하였으며 급기야는 자신들의 왕에게 절하며 경배하는 신사참배를 모든 식민지 국민에게 강요하였고 대부분의 국민과 심지어 목사와 성도들까지도 이 억압에 굴복하여 일왕에게 절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전쟁보다 더 참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집요하게 한국 교회의 정신을 세뇌하였으며 한국 개신교의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례라며 단계적으로 결의하게 이릅니다.

 

1936년 6월 한국의 감리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1938년 지금의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합니다.

 

그때 총회장의 이름으로 나왔던 성명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시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그러나 그 가운데서 앞장서 신사참배 거부한 분이 계셨는데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고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투옥되어 7년간의 고문을 견디다 결국 . 1944년 4월 21일 복역 중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주목사님은 총 4차례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되었는데 3번째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로부터 신사참배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며 목사 파면을 당하셨으며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께서 시무하셨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말뚝을 박아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그래도 주기철 목사님은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 4번째 구속 후 48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의 정절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신앙의 지표입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순교자의 길이기 전에 순수한 신앙의 길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국민과 나라와 신앙을 삭제하려는 일본 제국 시대의 공격에 반일민족운동의 소중한 지표가 되었음을 우리는 지금도 그의 글과 그의 말씀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의로 인하여 받는 고난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주기철 목사님의 목회지 산정현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말씀을 통해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 나눠보고자 합니다.

 

당대의 일본 제국주의라는 절대 권력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의 지조와 정절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의 제목은 ‘다섯의 나의 기원’입니다.

 

첫 번째 기원 :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저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제가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리이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일사각오. 한 번 죽는 것 당연하니 그 시기가 당장 온다한들 뭐가 두렵냐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정절을 지키며 죽음을 맞겠다는 겁니다. 즉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드리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의는 용기를 낳고 용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두 번째 기원 :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오리까. 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감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고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모든 인간이 단번이든 서서이든 죽음에 이르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죽였다가 다시 살리고 또 죽이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죽이는 고문은 견디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장장 7년 동안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기도는 참으로 예수께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냐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모습과 동일 한 것입니다.

 

​세 번째 기원 :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제 어머님이 저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는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제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차이고 매 맞아 상할 때 제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제 어머님을, 칠십 넘어 늙으신 제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제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제게 바치었거늘 저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제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늘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제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들을, 제 양 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납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 떼 중에 제 양들을 두고 갑니다. 맡기나이다. 제 양들은 대목자장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가족, 그리고 교우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의인은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신중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모친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우선순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습니다.

 

네 번째 기원 :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圖生 :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려고 함) 피할 줄이 있겠습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모든 백성,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과 성도들까지 다 신사참배를 하던 때에 그는 외롭게 자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평양아 평양아, 예루살렘아, 모란봉아, 대동강아’ 부르고 통곡하면서 의에 살고 의에 죽겠다는 고백과 함께 이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원 :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주목사님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허락하셨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당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런 축복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파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축복의 역사가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오정모 사모님과의 마지막 면회 시 대화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오정모 사모 :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옥문을 나오실 수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 :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서 기도해 주시오.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 거요.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 교회 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 를 구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

오정모 사모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나요?

주기철 목사 :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이 주기철 목사의 죽음을 의롭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숭고하게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지킨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말하길 악을 부끄럽게 여기고 증오하는 정의심을 의(義)의 발단(發端)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권선징악은 사필귀정이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이기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인데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망하면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한번 눈 딱 감고 머리 숙여 절하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선 분들 가운데 영락교회 고 한경직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하고 나서 초대형 교회 담임하면서 한국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기철 목사님은 어리석게 죽임을 당했느냐는 것입니다.

 

주목사님은 성경에서 신앙의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유대교의 성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느냐?

언제까지 성령을 거스리겠느냐며 유대인을 질책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48-60).

이거 오바입니까? 이거 주제넘게 나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 것입니다.

맞아 죽을 지언정 시키면 하는 일사각오를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네로시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다 로마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얼마든지 도망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죽으러 제 발로 로마를 향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무엇과 연관 되었을까요?

 

바로 의와 연관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살리는 의지 죽이는 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세상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는 것을 잘못 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세상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타협은 다릅니다.

 

신사참배를 하면 교회를 유지 할 수 있게 해 주겠다.

신사참배를 하면 목사직 유지하고 국가에서 협조한 공을 인정하여 높은 자리를 주겠다

 

이것은 타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타협으로 성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부정스러운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직장 주인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고객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은 여러분의 주인이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기준에서 잊혀지기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만 의롭게 살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면 그땐 복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진짜 복된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어떠한 의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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