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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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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들의 복

마태복음5:1-12

 

요즘 싸우는 사람을 보면 첫 번째로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싸우시려거든 국회로 가시죠.

 

두 번째로는

아니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입니까. 여기가 교회입니까?

 

라고 한다고 합니다. 참 입맛이 씁쓸합니다.

 

교회와 국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국민, 즉 백성을 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국회는 입법을 통하여 국가의 법을 세우고 지켜 국민들을 잘살게 만들어 주는 곳이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알려 새 소망의 복된 소식을 알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둘 다 아주 좋은 나라를 만들거나 소개하여 밝은 미래를 세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기관의 보편적인 모습은 언제나 싸운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것도 무엇을 얻으려하는 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서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언제나 싸움과 다툼이 멈추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 다수의 국민들이 국회와 교회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지독한 법으로 국민들을 괴롭히는 유대민족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이 어떻습니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독선적이며 외식적인 법으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나이 들어 병들어 힘없는 노부모가 계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부모 공양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고르반”이란 법과 제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르반”하고 외치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재물은 어떤 사람에게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물론 부모님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 제도는 불효자들이 부모공양을 면하려는 편법으로 악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때문에 병들고 늙은 부모를 못 모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자식을 진짜로 불에 태워 제사를 지낸 자들도 적지 안 습니다. 이런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며 경우에 따라서는 미워하거나 증오의 대상이었던 남의 자식이나 어린아이들 심지어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여 친 자식까지도 제물로 사용하여 없애 버리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만행은 이 정도의 행동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끔찍하고 경악케 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저질렀습니다.

 

바로 그런 아주 악랄한 민족에 자손으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지속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그 무언가의 힘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로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시며 스스로 마지막 재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 재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화가 멈춰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이제는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 길을 터놓으신 것입니다.

그동안 쌓였던 앙금과 오해와 불신과 증오를 예수께서 대신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대 화해를 낳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평화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며 인류역사상 첫 번째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여자와 남자를,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를, 죄인과 의인을, 동양과 서양을 화합케 하는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국회는 국민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먹고 살고 입고 교육받고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법을 만들어서 모든 국민들이 행복하게 해 줘야하는데 그것을 왜 못 할까요?

 

교회는 국민들이 절망하고 다투고 분열된 마음들을 추스리고 화해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왜 그것을 못 할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더 상고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고 우리가 그 누구보다 더 화평케 하는 존재들이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왜 세상의 화평의 도구가 못 되는 것일까요?

 

1. 교회의 본질 즉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라고 합니다. 이는 “안으로 불러 모은다”라는 개념이 아니고 “밖으로 불러 모은다”라는 개념이므로 진정한 의미는 “밖으로 불러낸다.”라는 의미가 더 큼니다. 물론 밖으로 불러낸다의 의미는 죄악으로부터의 탈출 및 이기심과 잘못 된 관행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지만 교회는 훈련된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야하는 사명이 있으므로 “밖으로 내 보낸다”라는 의미는 진정한 교회의 참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이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흩어지기 위한 존재이며 흩어 질 때 맨손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복음을 부여잡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고 싶다고 막가고 막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훈련시켜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후 세상으로 보내심같이 교회도 성도들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내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훈련일까요?

 

그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A 서로를 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중국의 두 나라를 화해시키기 위해 보름달과 초생 달의 예화를 들어 화해시킨 예화

 

• 교회는 이상하게 복음을 증거 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증거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초신자들에게는 어려운 말이겠지만....

 

• 같은 말을 해도 꼭 차별을 두고 말하므로 열등감을 조장 합니다.

교회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그 교회 몇 명이나 모여요?

 

• 직분도 이상하게 상하조직처럼 말을 합니다.

직분이 뭐죠?

언제 장로가 되셨어요?

 

이런 기본자세와 언행에 대해서 교회는 너무 외면하고 있고 반면에 성도들은 이런 자세를 싫어하면서도 어느덧 물들어 자신도 모르는 순간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격교육입니다.

성경교육보다 더 앞서야 하는 것이 인성교육입니다.

되 먹지 않은 인성에 아무리 복음을 뿌려봐야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자갈 밭 같은 마음에 씨를 심어봐야 그 씨는 곧 타 없어 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어디를 가도 복음이 맨 마지막 수단입니다.

배우고 먹고 입고 고친 후 변화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할 줄 모르는 자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을 위해 희생 할 수 없는 자가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시간과 돈과 힘을 줄 수 없는 자가 이웃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다못해 말이라도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만 귀신처럼 줄줄 외울 줄 알았지 그 성경에 단 한 줄만이라도 실천 할 줄은 모르는 것이 교회에 모인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해가 가능할까요?

이해가 가능 할까요?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교회는 이웃을 높여 주는 훈련을 받아야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이 높임을 받아야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믿는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나간 옛 이야기입니다.

 

교회 오면 누구나 높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아는 분한테는 언제나 “훌륭한 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문제 있는 분한테는 “가능성이 있는 분입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부족한 분에게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며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성도들이 화평케하는 자들입니다.

 

B 두 번째로는 내가 먼저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끔 보면 “다 맡은 다음 남는 거 있으면 내가 할께”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의미론 적으로 보면 “귀찮고 어렵고 힘든 일, 내가 하겠다.”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누가 하기 전 “이것은 내가 할께”하는 솔선수범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런 분이 세 사람만 있으면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성도 간에 솔선수범은 그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그것을 알기에 악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 같은 의미를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분명히 부작용을 낳습니다.

교회는 그런 솔선수범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기획하고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가로 막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닌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직 솔선수범을 성경적으로 가르치고 보여주는 일은 멈춰서는 안 됩니다.

 

솔선수범은 언제나 손해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계산을 해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뒤에도 계속 내가 해야 할 것 같은 안 좋은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동체 안에 화평의 촉매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두 명의 예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 명의 예수가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날 인류의 평화에 기여 할 또 다른 예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누굴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나 한사람이면 족하다는 신념이 필요 할 뿐입니다.

 

텔레마커스라는 수도사에 의해 중단 된 검투사의 경기

 

C 용서의 원칙 하에서 살게 해야 한다.

 

인류에 대한 성경의 주제 핵심은 “인류는 죄를 짓고 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다” 입니다.

 

그 거룩한 뜻을 살려야 교회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역행해서는 교회가 될 수 없고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더럽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인간이 누구입니까?

 

우리 부모입니다.

나의 자식입니다.

내 친구들입니다.

우리교회 목사님입니다.

내 아내와 남편입니다.

 

그들이 왜 더럽습니까?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벼라 별 짓을 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알고 느끼십시오.

절대 내 부모, 내 자식, 내 목사, 내 남편과 아내는 안 그럴 것이라는 망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했을 때 “이미 난 다 알고 있었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용서”입니다.

 

“난 네가 그럴 줄 몰랐어” 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지 마십시오.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에워싼 죄악의 환경을, 막아주지 못한 나의 무능을, 오히려 용서해 달라고 붙들고 우는 것이 바로 우리를 화평케하는 준비된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을 화평케하기 위해 오신 화해의 첫 열매입니다.

그럼 두 번째 열매는 누구입니까?

 

지금도 찾으시렵니까?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화평케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여러분께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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