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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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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 4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1-12

 

 

어떤 집에서 하루는 아들이 큰소리로 기도를 하더랍니다.

“하나님 저에게 변신로봇을 하나만 사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엄마가 말하길 “하나님께서는 네가 속으로 기도해도 다 들으신 단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조용히 기도 하렴” 그러자 아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만 들으면 안 되고 엄마 아빠도 들으셔야 하거든요.”

 

자기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가막힌 아들의 적극적인 지혜가 놀랍습니다.

그렇습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능력자에게 적극적인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철없는 아이들은 부모가 안 들어주면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훔친다든지, 빼앗는 다든지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기에게 그런 변신 로봇을 사 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른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오직 능력자의 맘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을 할 뿐 다른 것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지 인내하며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방법을 찾지 않고 기다린 다는 것은 진정 지혜로운 자입니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을 유약한 사람으로 오해를 합니다.

물질만능주위와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온유한 자는 무능한 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란 우리가 생각하는 유약한 것이 아닙니다.

 

 온유란 힘이 있는 자가 그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마26:53).

 할 말이 없고,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할 말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마12:19).

 온유란 옳은 것을 말하되 흥분하여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시37:8).

 온유란 자기의 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 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시37:7).

 온유란 사람들의 비난에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재료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민12:1-3).

 온유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마12:14,15).

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도모하기 전에 묵묵히 작은 일을 잘 감당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출2:17).

 온유란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의 뜻으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욥1:21,22).

 온유란 물질 때문에 다투지 않고 화평을 위해 손해를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창26:22).

 

이것을 정리하면 온유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유입니다(시37:7,출2:17,욥1:21,22,눅22:42)

 

하나님이란 존재는 사람들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의 주인이며 또한 출처입니다. 그것을 믿고 기다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온유입니다.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한 인물입니다.

욥은 돈 있고 지혜 있고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돈 잃고 건강 잃고 자식들까지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나 같았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입니다.

아내조차 당신의 그 이상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할 만큼 욥은 억울했고 참담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알고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킨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하지 않고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관계를 유지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유입니다(마26:53,마12:19,시37:8,민12:1-3,마12:14,15)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보내 주신 이웃입니다. 그 이웃과 어떤 삶의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엄청난 인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느끼고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아벨만 없어지면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가인은 대인관계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꾸짖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이미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가인이기에 하나님도 그의 제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은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이로써 가인이 온유하지 못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대인관계에서 독보적인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자기의 죄는 물론 남들의 죄를 용서 받기를 원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언제나 부르짖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할 만 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모세를 원망했고 책임의 소재로써 모세를 지목했습니다.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늘 모세는 억울하게 백성들의 지탄을 받고 살았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재혼을 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디오피아인은 흑인입니다. 모세가 흑인 여자와 결혼하자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그를 모욕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세의 결혼 문제만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영적 지도력 자체를 비방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모세의 지도력이 점점 커지자 가족 내에서부터 권력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모세가 흑인 여자와 결혼한 것을 핑계 삼아 모세의 지도력을 상대화 시키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이때 모세는 어떤 변명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보면 아론에게 따질 말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 갔을 때 백성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도록 한 것이 누구냐?” 하고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12장 3절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혈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노동 감독관을 살해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서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모세는 화를 내며 십계명 돌판을 던져서 깨뜨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온유는 무엇입니까?

 

후천적 인격 즉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을 같이 원망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들 편이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세의 그런 자세를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온유한 모세의 모습이 하나님의 맘과 합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아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과의 관계에서 온유입니다(창26:22).

 

물질에 대한 개념은 사람이 물질에 대한 접근 방법을 선택하게 만들고 그것은 결국 이 사회에서의 생생한 역할을 보여 주게 됩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 거할 때 우물을 판적이 있습니다. 당시 목축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물은 가장 큰 재산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우물은 그랄 땅에서 목축을 하는 목자들에게 빼앗깁니다. 한번이 아니라 두 번씩 빼앗겼어도 이삭은 묵묵히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 이삭의 자세에서 우리는 온유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총이나 칼 같은 무력을 행사하여 땅을 빼앗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주시는 이는 이웃이나 내 노력이나 어떤 운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삶의 네 가지 원리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가 비폭력적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폭력이나 폭언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가 역동적입니다. 조용한 것 같으나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 합니다.

세 번째가 자기 통제력입니다. 정신과 육체를 함께 다스려야 합니다.

네 번째가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자기만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의 것을 남의 것을 훔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의 것은 억지로 가져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것은 가만히 있으면서 저절로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주인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인간적인, 세상적인 모든 일을 멈추고 기다리는 것이 성서적 온유입니다.

 

그런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땅이 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땅위에서 얼마든지 갖을 수 있는 통치권과 소유권이겠지요.

그토록 사람들이 원하는 아파트인지 작물을 기를 수 있는 농장인지, 아니면 훗날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인지 그것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온유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라며 궁금해 하면 할수록 사람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곧 조급증과 집착과 갈증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온유는 곧 믿음이며 소망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소망과 믿음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틀림없는 것은

 

 모세에겐 하나님의 전폭적인 신뢰를 보증해 주셨습니다.

 이삭에겐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물질과 우물을 소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 욥에겐 지옥 같은 저주에서 벗어나 재물과 건강과 자녀까지 다시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 온유한 자들은 어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온유한 자들은 어떤 악한 이들을 만나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조용하고 당당하게 산다 는 것입니다.

 그들의 세상은 우리랑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지난해 수백만 명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이는 기독교가 본연의 역할을 망각하고 축복과 기적만을 강조해 온 결과입니다.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에 관심이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수천수만 가지는 족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봐야 그중에 고작 몇 가지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면 그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바로 모세처럼 하나님을 소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들이 잘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복은 복 같아도 사실은 복이 아닙니다.

 

원인 모를 나의 공격성과 폭력성, 분노, 원망, 질투는 온유를 저해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삶은 궁핍해지고 인격은 망가지며 더불어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리는 온유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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