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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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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 3

 

애통하는 자들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소문만복래”란 말이 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심리치료학에서도 “웃음치료”란 분과가 생겨서 하루에 몇 번씩 몇 분을 웃으면 암도 고친다라며 세상의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치료과정이 고통과 눈물 없이는 극복 할 수 없는 극한상황의 치료뿐인 세상에서 웃으면서 암을 치료 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이겠죠?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선 웃는 것이 복이 아니라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파라독스란 말씀 아시죠? 이 단어는 “역설”이란 뜻으로 “물이 철보다 강하다”라든지 죽음이 행복이라든지 화살이 나라가는 것이 아니라 과녁이 내게로 오는 것이라든지 이런 상식에 반한 주장들을 일컬어 “파라독스”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파라독스가 무척 많이 포함되어있고 팔복은 그중에서도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팔복가운데서도 오늘의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은 역설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역설일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슬픔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지만 모든 슬픔이 복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울증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의 울음이 결코 복 있는 울음이 아닙니다.

야망이 좌절되어서 원통해 우는 것도 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는 울음도 그 자체가 복 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애통하지 않으면 복은 생각도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에게서 아무런 의도 발견하지 못하고 영적인 빈곤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심령을 바클레이는 “복된 빈곤”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따라서 팔복의 첫 선언은 심령이 가난한 것, 즉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으로 파산한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두 번째로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한 것을 알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면서 자연스럽게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자신을 구할 능력이 전혀 없고 스스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임을 발견할 때 절로 나오는 애통이며 슬픔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최대 고민은 자신과의 직면입니다.

대면은 좋은 점을 보기위한 시도이고 직면은 솔직한 진면목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약점 앞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을 “자기 유기”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아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러니 애통할 리 없습니다.

 

이 깨달음 앞에 내 자신을 세워볼 때 즉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애통함입니다.

 

예수님은 처절하게 슬퍼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된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슬퍼한다고 다 복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에 대해서, 어떤 문제 때문에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 주신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첫째가 바로 죄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재산을 손해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불행으로 인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이웃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큰 슬픔을 느끼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요즘은 더 그렇습니다.

 

살인을 하고, 다른 사람의 가정을 망가뜨려놓고, 각종 악한 일을 일삼고도 반성하거나 애통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에게도 이런 애통해하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깨우쳐줘도 회개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경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단 한군데도 예수님께서 웃으셨다고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요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신 것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를 살리러 가셨고, 잠시 후에 다시 나사로가 살아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부모님처럼 의지하고 살던 오빠를 잃고 슬퍼하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불쌍해서 우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고 애통하셨던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가져 온 무서운 결과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월불멸의 복을 차버리고 사탄에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이 결과가 너무 자명한 것이기에 이 죄의 결과를 아는 사람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시 119:136절에 다윗이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48절에서 예레미야가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라고 했습니다.

 

빌 3:18절에 바울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학사 에스라도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모든 이들의 슬픔이며 애통으로 표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통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움입니다.

 

여러분 누굴 그리워 통곡해 보신 적 있습니까?

첫사랑에게 딱지맞고 울어본 적 있습니까?

진실하게 사귀던 애인과 작별해 본 적 있습니까?

사랑하는 부모님이 돌아가셔 그리워 밤새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떠나 이국에 살면서 고향산천이 그리워 못 견디게 외로워 본 적이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외로워 몸부림치며 우는 그 애통함이 바로 이 성경에서 말하는 같은 종류의 애통함입니다.

 

그런데 진정 그리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나 고향이 아니라 떠나온 하나님의 영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생기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본래 살 수 없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쌓이고 쌓여져 너무 무뎌지게 된 상태라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뿐 대단한 외로움과 그리움을 갖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처음에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그리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무감각해지다가 나중에는 현실과 자신과의 괴리감 때문에 자신을 버린 부모를 증오를 한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나님을 포기하고, 멀리하고, 나중에는 하나님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끼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정도는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내 근본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이야말로 진짜 불행한 삶입니다.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슬픈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실된 우리의 메인 바디를 찾아야 합니다.

즉 처음 결정되어 진 인생의 마더보드 안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내 자신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기기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들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의 의미가 뭔지 밝혀졌습니다.

 

애통은 드라마를 보고 흘리는 눈물도 아니고, 이산가족들이 만나서 흘리는 감격적인 눈물도 아니고,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고,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서 흘리는 눈물도 아닙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말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가?

내속에서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나는 화를 잘 내는가?

어째서 나는 시기 질투하는가?

어째서 나는 좀 더 진실하지 못한가?

어째서 나는 좀 더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가?

내 성질은 어째서 이리도 못 된 건가?

어째서 나는 나를 억제할 수없는 것인가?

 

그것을 미워하면서 그것 때문에 애통해해야 합니다.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심령이 가난해 본적이 없어서 실제로 죄 때문에 애통해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교회에 속하고 직분까지 맡았다고 해도, 그는 아직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위로를 받고 사십니까?

저는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하면 영화를 봅니다.

그러면 그나마 꼬인 맘이 풀리고 상한 감정이 좀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막 먹으면 위로가 된다고 하고

심지어 울면 위로가 된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술에 만취가 되어야 위로가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위로를 삼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성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으로는 절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그런 것으로는 절대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존재라서 입니다.

 

술, 음식, 돈, 명예, 이성 등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귀중한 것을 빼앗아 가면 빼앗아 갔지 절대 위로나 만족을 주는 존재는 아닙니다.

 

위로는 우리의 삶에 근본을 바꿀 수 있는 반전을 일으킬 수 있어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비탄에 젖어 잊는 우리 마음을 위로해 주고 달래 줄 수 있는 단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뿐 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과 육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위로 할 이시는 오진 하나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 앉아서 탄식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는 너를 고치시리♪

 

 

시 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위로를 받으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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