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조회 수 9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팔복강해 2

 

마태복음 5장 1절-12절

 

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이정도면 됐지 하는 맘입니다.

이정도 기도하고 이정도 공부하고 이정도 헌신하고 이정도 헌금하면 됐지...하는 만족입니다.

 

이 자족은 사도바울이 고백한 비천한 곳에도 만족하고 어려운 상태에서도 이겨내는 그런 자족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정도면 충분하다는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교만의 맘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의 대표적인 모습은 슬픔이나 고통, 아픔 등을 태생적으로 피합니다.

 

● 교만한 자들의 특징

 

1. 언제나 나는 무엇이든 충분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계3:14-20절)입니다.

돈, 지식, 명예나 혹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면에서 자신을 높게 평가 합니다. 지독한 절실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삽니다.

 

2. 종교 생활에 있어서 신앙은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기에 덮지도 않고 미지근합니다.

구원이나 회개 등 인간의 약점들을 들춰내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양다리 걸치는 삶을 살며 그것을 지혜로운 삶의 균형이라고 믿습니다.

땅에서 잘 뛰고 물에서도 헤엄을 잘 치는 개구리처럼 세상에도 잘 적응하고 교회생활에 도 잘 적응합니다.

 

3. 이웃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은 그들의 무능 탓이므로 자신과 무관하게 생각을 합니다.

혹시 그들을 돌보더라도 자신의 이름과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자기의 풍요로운 삶에 만족해 그렇지 못한 가난한 자들을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한 단계 아래 사람들로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멋지고 당당하고 세상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 좋은 직장, 화목한 가정, 여유로운 경제형편 등 이런 것들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 잘 못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써 지극히 정상입니다.

어떤 경우도 가난이 아름다운 것이라며 가난을 정당화하거나 미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복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상태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가난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심령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심령의 상태에 따라서 돈도, 권세도 명예도 복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먼저 ‘가난’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의미하는 두 가지 종류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페네스’ :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가난

둘째는 ‘프토코스’ :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당장 살아갈 수 없는 가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배고파서 당장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가난

너무 마시지 않아서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는 갈증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력한 사람의 가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무슨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 보이죠.

 

이 감 잡기 어려운 심령이 가난했던 대표적인 사람을 모델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바로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시편 40:17, 70:5, 86:1) 자기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다윗은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신분적으로 절대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배고프고

군사가 있어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언제나 패배하고

엄청난 땅을 지배하는 열방의 왕이면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지배받는 자고

많은 아내와 자손을 두었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면 행복이 아닌 불행한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아 늘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가난한자는 눈에 보이는 능력은 있어도 무기력 한 자입니다.

마음이 가난 한 자는 박사라도 모르는 자요

재벌이라도 가난 한 사람입니다.

나는 있는 것 같으나 이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조차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산는 것입니다. 심령이 부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 한자들은 이러한 문제에서부터 심령이 가난해 집니다.

 

죄의 문제

 

죄는 그 자체가 절망입니다.

죄가 나를 이끄는 삶은 나로 하여금 죄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돈이 죄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명예가 죄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권세가 죄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죄를 컨트롤하며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죄가 나를 컨트롤 한다고 믿으면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부유한 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을 감추려고 자신의 실제의 평가와는 다른 평가를 받기 원합니다.

죄에 대해서 뻔뻔한 자...결단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돈 많은 죄인으로 사시길 원하십니까?

 

죄의 문제를 부끄러워하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 맘을 찢는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2. 분노의 문제

 

이웃과 등을 지는 행위는 주님과 갈라서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한동안 막혀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개선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단절도 회복 시키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이웃의 연합을 위해서인데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타나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니만 기독교인이요 사실은 반 기독교인이지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웃 앞에 무릎 끊고 이웃과 손을 잡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나의 삶을 이웃을 통해 이루려하지 말고 이웃이 나를 통해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통해 얼마나 많은 분노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분노를 죽여야 합니다. 이 분노가 심령을 가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할 때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위기로 봅니다.

그 간절한 필요가 이루어졌을 때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해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와 해소의 사이에서 진정 참된 인간성을 볼 때는 위기의 순간이랍니다.

해소를 축복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막상 해소가 되고 난 후의 모습은 위기 때의 순수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길에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할 이시기가 바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없으면 안 된다. 없으면 큰일 난다. 없으면 죽을 것 같다”라고 울부짖으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던지 벼라 별 기적으로 인생의 반전을 기대하고 있겠으나 아닙니다. 누구도 돕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가난 그 순간이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가 20대 초반에 군에서 고칠 수 없다는 병을 얻어 의병 제대를 하고 집에 와서 환자 신세로 전략하여 병도 못 고치고 사회생활도 못하고 고생하던 중 어느 장로님의 소개로 기도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철원에 대한 수도원이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는 의술로는 힘들다하니 기도로 낫던지 죽던지 알아서 하란 말씀과 함께 하산하시고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도울 수 없는 그런 참담함이 무엇인지도 그때 알았습니다.

 

그때 회개바위라는 곳에 올라가 앉아 아래를 보니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데 수량도 많고 빨러 그 흐르는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 회개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하여 회개바위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생각납니다. 뭐 남들은 하나님께 치료 받을 때 30일을 회개를 했느니, 뭐 어쨌느니 경험담들을 많이 늘어들 놓습니다만은 저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제 몸 하나님 것 맞죠?

그럼 제 몸 다시 돌려 드릴께요. 이런 망가진 몸도 필요하시다면 맘대로 하세요.

저는 이제 저에게 대한 모든 희망을 다 버리겠습니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 맘대로 사용하세요.

그렇게 기도해 놓고는 젊디젊은 꽃다운 나이에 병들어 인생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는 설움이 복받쳐 저의 불쌍한 나약한 인생이 서러워 통곡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저를 살리셨습니다.

많은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로 만들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여겨지는 모든 일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많은 속상한 일들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제가 제 것이 아니므로 남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제 명예나 건강이나 돈에나 소문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적어도 제 자신에 만큼은 지극히 가난한 자입니다.

절대 높아 질 수 없고, 절대 명예로울 수 없으며, 절대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세 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35년 전에 죽었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필요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몸이 되기를 언제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좀 그런 순간이 지나면 인간은 그런 것 다 잊어버립니다.

특히 위기감이 사라지면 간절함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면 언제 그랬는지 이미 부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새 기도하지 않고 어느새 교만해 졌으며 어느새 하나님에게 대한 간절함이 사라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회개바위에서 통곡했던 시간들을 회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서러워 울던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하나님이 절실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 심령이 그만큼 부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영원히 필요한 것이 아닌 순간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깐 결국 그것들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신앙과 믿음은 그런 것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절실한 자들입니다.

 

다미엘신부의 간증

 

과거 하와이는 부족 간의 싸움 때문에 생지옥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부족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인하여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그런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지옥을 변화시킨 것은 선교사들의 복음전파였습니다.

 

그런 하와이에 데미안이라는 신부가 모로카이 나병환자 촌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복음을 거부하면서 “당신도 우리처럼 나환자가 되어 보라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는가?” 그 소리를 들은 데미안 신부는 하나님께 가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도 나병 환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들의 친구가 되게 해 주세요. 저들의 생명을 구원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다미엔신부는 결국 나환자가 되었고 기쁨에 넘쳐 그 부족으로 뛰어가 나도 당신들처럼 나환자가 되었다고 진실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들 나병이 낫기를 위해 애쓰는 그때 유독 나병에 걸렸다고 기뻐하는 데미안을 모로카이 나병환자들은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신부의 간절한 진심만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미엔신부의 죽기전 마지막 유언은 나병 환자가 된 것이 젤로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다미엘 신부의 이런 마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삶이 성경에서는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영은 아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이 살아야 돈이 살고 영이 살아야 명예가 삽니다.

이 말은 육이 죽어야 돈이 의미가 있고 육이 죽어야 명예가 영예롭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으로 부자가 되려하지 말고 영적으로 가나한 자들이 먼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