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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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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 1

마태복음 5장 1절-12절

2016년 6월 5일 가까운교회 주일 낮

 

들어가는 글

 

블란서의 한 젊은이가 정신병원을 찾았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의 정신적 불안증과 우울증에 대하여 호소하였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조언 끝에 그 도시에 유명한 희극 배우가 와서 공연을 하니 그 공연을 꼭 관람하라고 했다. 웃어야 그나마 그런 증상을 치유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병원 문을 나서며 말하기를

“그 유명한 희극 배우가 바로 나요....” 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있는 그가 왜 행복 할 수 없었을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웃지 못 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다윗과 신약에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으로서 삶을 살라고 이미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가치 있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또한 여러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오히려 불행해 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의심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렇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속 시원하게 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남보다 돈을 명예를 지식을 많이 갖는 것(경호원 대리고 사는 것이 행복한가)

예쁘고 멋진 사람과 함께 사랑하고 사는 것(가장 빠른 길 : 애인과 함께 가는 길 / 자살)

남들보다 더 맛나고 멋진 집에서 사는 것(배부를 때 먹이는 음식은 화나게 한다)

이렇듯 늘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에 목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복에 대한 근본 개념을 정리하여 하루하루를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복이란 무엇일까요?

 

Ⅰ. 한국적 복 개념

 

한국적 복의 개념은 정신적 지주였던 중국에서 흘러 들어왔습니다. 새해만 되면 복주머니, 복조리 등이 잘 팔리고 또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 국민에게 지배적인 복 관념의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통속적 복 관념은 중국의 복 관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닌 인간 운명의 조정자로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리시는 ‘보이지 않는 힘’에 불과합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4세기경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샤머니즘을 철저히 경계했고 멀리했으나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민중들 속에 들어가기 위해 신화와 샤머니즘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불교는 점차 미신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고려 말에 이르러 점차 절간의 입구에 장승이 세워지고 절간 안에 산신(山神閣)이 들어서게 되기에 이릅니다. 현재 무당들이 착용하고 있는 고깔, 옷, 경쇠(磬金) 등은 불교에서 온 것이며 무당들이 부르는 무가(巫歌)도 거의 불교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샤머니즘과 불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는 주역(周易)이라 불리 우는 유고의 교과서를 통해 종교가 아닌 생활의 철학과 인간의 도리를 내세운 윤리사상이 모체입니다. 유교는 아 주역으로 천문, 의학, 시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시작했으나 우리나라에 와서는 결국 샤머니즘의 공격으로 관상(觀相), 풍수(風水), 사주(四柱) 등을 봐주는 도구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은 샤머니즘의 첫걸음이자 중심인 가정에 붙어사는 조상 신(家神) 숭배사상과 결합하여 드디어는 제사망국(祭祀亡國)의 현상을 빚었는데 제사망국이란 말은 “제사로 인하여 가정과 나라를 망친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는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적 정신토양의 특성인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비는 미신적인 생활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떨까요?

한국기독교 전파 후 세계가 깜짝 놀란 것은 100년 만에 그 어떤 종교도 이렇게 성장을 이룰 수 는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단일민족에 쇄국정책까지 펼쳤던 비교적 폐쇄적인 나라였으며 게다가 문맹자가 많았고 수많은 질병이 창궐하였으며 복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미개한 민족이었기에 “선교국가에서 던져 주는 음식과 의복 등에 매어달릴 뿐일 것이다”라는 당초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불교와 유교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독교 역시 샤머니즘 앞에서는 힘도 못쓰고 말았습니다. 기독교가 전파 된 후 그 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샤머니즘으로 급작스럽게 발전하여 기독교를 등에 지고 샤머니즘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인의 종교관은 영적인 차원의 구원 개념보다 현실적 구복사상(求福思想)과 기복사상으로 얼룩져왔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신앙적 의식구조 속에 깔린 샤머니즘의 암반이 순수한 복음의 씨가 뿌리내리는 것을 지독히 방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기복적(祈福的) 신앙이 일반화됨에 따라 구속(救贖)의 복음을 전하는 성경 강해보다는 돈 벌고 병 낫고 축복받았다는 신비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체험 간증이 더 환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고 참된 진리를 전달하기보다는 돈 버는 법, 건강해지는 법, 결혼하는 법, 싸우지 않는 법 등에 메어 달리며 벼라 별 세미나를 다 엽니다. 그것이 복 받고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려울 때 마다 밝은 미래를 희망하되 교회에서 조차 비 성서적인 행동이 마치 복을 불러다 주는 주된 요인이라며 가르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므로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잘못 된 성직자나 교파의 교리에 물들어 샤머니즘과 결합된 요행주의적(僥倖主義的) 종교심을 갖게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자 그럼 그런 의미에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복은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실한 행복은 내 존재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의 개념도 따라서 바뀌게 되는데 그 복은 순간적인 복도 잠시의 복도 아닌 영원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보다 바꾸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존재입니다.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뇨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복 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내 죄를 사하시기위한 하나의 죄 사함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물론 이 죄 사함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죄 사함은 사람 측에서는 그냥 받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으로만 그치고 십자가를 그 상태에서 내려놓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죄 용서함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과거 죄와 무기력과 무능과 불행한 이전의 나를 죽이고 예수의 삶과 능력과 힘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능력과 힘을 갖고 내 존재가 변화해야 비로소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복이 왜 가난하고 징징거리고 두들겨 맞고 억울한 누명 쓰는 것으로 복을 규정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하지 않고 무언가를 받아서는 행복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행복’은 영어로 ‘해피니스(happiness)’입니다.

이 ‘happines’는 ‘해픈(happen)’이란 동사에 그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연히 뭔가 일어나는 것이 ‘happen’의 뜻입니다. 때문에 우연히 찾아 온 행복 ‘happiness’는 어느 날 갑자기 ‘해프닝(happening)’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은 Blessing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Blood에서 어원합니다. 이것은 피를 상징하는데 누군가 흘리는 피가 없이는 복이란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피가 없이는 행복 해 질 수 없는 것이 복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것처럼 내 행복은 누군가의 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토록 바라는 복은 누군가의 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다는 것을, 능력이 있어서 유명해 지는 것을 또는 대단한 무엇을 받았거나, 이루었거나, 도달했을 때 그런 것을 복이라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지금 현재 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의 상태를 소개하면서 이미 복 받은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8가지 상태로 구체적으로 소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복을 받은 자인지 아니면 복을 받아야 할 자들인지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교계에서는 팔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여덟 가지 복이 아니라 “복 받은 여덟 가지 증거”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가 복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측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 복이 필요한 자들인지 평가해 보란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이 여덟 가지 복 받은 자들의 증거를 하나의 결합체로 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까지 여덟 개의 복이 하나하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뿌리부터 잎사귀까지가 연결된 것 같이 여덟 가지의 증거은 모두가 연결된 하나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애통할 수 없고, 애통하지 않으면 온유할 수 없고, 온유하지 않은 데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덟 가지 증거들은 서로 분리해서 이해할 것이 아닌 하나의 완전체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여덟 가지 증거들로 인하여 각각의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받는 복과 애통하는 자라서 받는 복이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덟 가지 상태가 하나의 복으로써 설명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은 눈에 보이는 실물이 아닌 복을 받은 상태가 어떠한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이 증거들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덟 가지 복 받은 증거들은 중생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복입니다. 자연인 가운데에는 그 어떤 사람도 팔복에 서술된 것과 일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기질이 팔복의 영적 자질과 비슷하게 닮았다고 해서 그를 복 받은 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가 가진 자질들은 기독교의 영성과는 다르며,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덟 가지 증거들은 은혜의 결과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 여덟 가지의 증거의 결론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이 여덟 가지 복 받은 자들의 증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마음이 가난하셨고, 늘 슬피 우셨고, 온유하셨고, 옳은 일에 굶주리셨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고, 깨끗하셨고, 언제나 그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계셨고, 옳은 일에 목숨을 거셨던 우리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이란 매일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것이 바로 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 교훈에 의해 기독교인들은 복 받은 여덟 가지 증거의 특징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이 완전체로서 존재하고, 은혜로 주어진 성령의 산물이며, 이 여덟 가지가 예수님의 성품이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모든 특징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여덟 가지의 증거들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할 표지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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