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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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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문제와 기본문제

요한복음 20장 22절

 

요즘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입니다.

 

개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을 만나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면 누구든지 비슷해 보입니다.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하고 싶은 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말을 한 사람은 속이 풀리는데 듣는 사람이 괴로운 말이 있고

말을 하는 사람은 괴로운데 듣는 사람은 신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이 더 좋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중요한 말은 기분문제가 아니고 기본문제가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다소 듣기가 거북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지만

이 기본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앞으로 자신의 구원의 공로로 살아가게 될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기본이 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였고, 예수님의 시신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친 유대인의 분노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집에 은신하여,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면 밖에도 못나가고 방구석에서 벌벌 떠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꼴좋다, 아주 보기 좋네 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나 때문에 너희가 고생이 많다 미안하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요 20:2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너희가 이렇게 벌벌 떠는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세상의 무서운 고문과 조롱과 형벌이 무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교회가 하는 일이 쉽고 할 수 있고 재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실의에 빠져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구원의 열쇄와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바른 적도 들은 적도 본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교회가 선교를 부르짖음에 있어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 이 말씀의 전제 조건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사소한 것도 못 하므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작정하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의 말씀 중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고 하신 말씀의 근본 뜻은 같은 말로써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을 가르치고 바라게 하고 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픈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나의 억울함이나 괴로움,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복되게 하고 승리할 수 있게 하고 만사형통 하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 임을 내 입으로 생활로 모습으로 입증해 줘야 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한국어도 모르고 한국인도 모르고 한국의 문화와 종교도 모르는 미국, 호주, 케나다 사람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고

병든 한국인을 돈 안 받고 치료 해 주었습니다.

무식한 한국인을 돈 안 받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미신에 물 들은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무얼 바라고 왔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엘 왔겠습니까?

그들이 한반도에 복음을 들고 왔던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요 성령 충만이 가져온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한국 땅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평생 시집도 못가보고 헌신한 간호사들도 있었습니다.

의사로써 부귀와 영화를 못 누려보고 한국에서 환자들만 돌보다 죽은 의사도 있었습니다.

 

왜 입니까?

 

왜 그들이 청춘을 그렇게 불살랐을 까요?

바로 성령 충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른 나라는 볼 것 없이 호주를 볼까요?

성령 충만의 의지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지시를 받을 이유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상식적인 모습과 윤리적인 모습에서만 벗어나지 않았지 그들의 삶은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소속되었었던 연합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이기 보다는 교회 문지기 역할 만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닌 이름만 크리스챤이지 교회가 교회답게 사는 것을 가로막는 훼방꾼들인 것입니다.

자신들도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고 남들도 못 믿게 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는 구원받은 자들로써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경험에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라는 말씀인데 바로 성령의 시대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덤에서 나오신 그리고 승천하시며 남기신 예수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충만 이것만이 답이고 열쇄이며 해결입니다.

 

우리가 오늘 선교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선교는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생명을 남의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2017년 2월 러시아 이성화선교사가 시베리아 툰트라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이 선교 여행에 동참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는 여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항공기가 멈춘 곳에서 기차로 20시간 정도 가고 이어 자동차로 20시간 정도 가고 이어 교통편도 없어서 썰매를 타고 몇일을 가다가 혹시라도 뭔 일이 있으며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자야한다고 합니다.

영하 40도, 침을 뱉으면 땅에 침이 떨어지기 전에 얼고, 소 대변을 무심코 노상에서 봤다가는 신체의 일부가 그냥 동상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곳엘 가자는 것입니다.

 

글쎄요 저는 지금 글쎄요 라고 밖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사지인 동토의 땅을 향하여 이미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기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도 성령 충만 하지 않고는 감이 이 선교사역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 하면 모든 일이 가능해 집니다.

무수한 사람이 반대해도

무수한 강국이 가로 막아도

성령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하는 교회도 망하지 않습니다.

선교하는 나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선교하는 목사는 망하지 않습니다.

선교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영혼의 미래가 보장 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충만하라.

 

성령 충만은 방언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기분이 아닙니다. 나의 알량한 선택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씌워진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충만을 받아 이 세상 곳곳에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도, 가정,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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