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삶

by 관리자 posted Oct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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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삶

요한복음 3장 1~ 21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바른 삶을 가르치시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거의 바리새인들이 주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관원들이 대부분이었고 재물도 상당히 많이 보유한 지역 유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란 것이 대부분 구약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 조차도 구약 말씀의 다가올 예언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했습니다. 읽고 설명은 해도 형식 적일뿐이지 핵심은 모르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등장과 그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가장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였습니다. 자신들의 교과서적인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의 가르침은 역동적이고 생명이 있었으며 마치 갈한 목을 적시는 그런 치유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요동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국의 바리새인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한명 예수가 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엔 항상 이적과 기사가 따랐습니다.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았고 어떤 문제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람들이 보여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바리새인 중 니고데모라는 신실한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등장으로 인하여 다른 바리새인과는 달리 자신의 무능과 더불어 차별화된 예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들이 증거합니다.”라며 예수의 존재를 시인합니다.

 

그때 그 장면이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씀을 들은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더욱 신령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보려거든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되는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머니의 태속으로 다시 들어가 또 다시 나오는 것이 거듭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니고데모의 질문에 답하신 말씀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 남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사람들이 육적으로는 세상에서 필요한 육신을 가지고 세속적인 삶을 살지만 영적으로는 세속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중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삶의 균형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고 영적으로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신비주의(Gnosis :영지주의)로써 엄연한 이단입니다. 더불어 세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취해 영적인 삶을 등지고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현실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런 삶의 균형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사람 스스로 이런 문제를 해결 한 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이 문제를 오늘 말씀에서 그 답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육간의 균형은 사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야 만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이 바로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며 성령에게 나의 주권을 이양 할 때 비로소 거듭난 삶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기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과거 예수를 따를 던 수많은 백성들은 예수의 이적과 기적을 보고 쫓았습니다. 지금도 예수의 그런 능력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께서는 한결같이 그런 능력과 이적을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본질적인 그런 표적에 의해 인간의 믿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계를 당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봐도 거듭 난 자들의 시선과 세속적인 사람의 시선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개인의 구원과 세상을 구원하고자 함이지만 사람이 바라는 이적은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그 일은 거듭난 자들이 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이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판자가 아닌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죽이러 오신이가 아니라 살리러 오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속의 성경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원리가 잘 녹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할 세 가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1. 빛을 가져야 합니다.

 

빛을 갖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삶을 인정하고 그 삶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본질상 진노의 자녀 이므로 어떤 경우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거울이 스스로 사물을 비추지 못하고 빛을 받아야만 그 빛의 반사로 사물을 비출 수 있듯이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인도로 만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성령의 도우심과 동행을 간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어둠으로 가야합니다.

 

빛은 밝은 데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고스럽지만 어둠속으로 걸아가야 합니다. 예수는 늘 회당을 버리고 죄 많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많은 이들이 버린 자들을 향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세리 마태를 제자 삼으셨으며 수많은 병자와 죄인들을 벗 삼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성도들은 이 부분에서 주저앉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율법의식으로 인하여 어둠을 이미 정죄하고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을 사랑하기는커녕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말라는 나의 의지가 성령과는 반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둠속으로 나가려는 수고와 용기는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치사하고 아니꼽고 우습지만 바로 그런 자를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기꺼이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용기와 담력이 없다면 주님께서 원수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뜻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3.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돈으로 산다면 얼마나 할까요? 아마 이 세상의 현찰로는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져 받은 우리에게 주께서 내거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다시 거져 주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명성도 칭찬도 바라지 않고 거져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거져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낌없이 이웃에게 전해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에

호주라는 나라에는 븕은 먼지와 잡초와 파리만이 드글거리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의 주인이었던 영국은 넘쳐나는 죄수들을 호주 땅에 이주 시켜 살게 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영국에서 실어 날라주었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하면서도 골칫거리는 바로 양떼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죄인들이지만 먹어야 했고 입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다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양이었습니다. 고기는 먹고 털과 가죽은 옷과 이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몇 달 동안 어떻게 양들을 죽이지 않고 호주가지 싣고 가느냐에 있었습니다.

배에는 수천마리의 양과 양들이 먹을 건초더미를 산처럼 쌓아놓고는 영국을 출발 합니다.

얼마간 양들은 마른 풀을 아주 잘 먹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 이상 지나 약 3분의 2 지점 쯤에 달하게 되자 갑자기 양들이 마른 풀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별 짓을 다해도 양들의 금식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지나고 양들은 말라가기 시작합니다. 목동들의 맘은 타들어 갑니다. 이러다가 수천 마리의 양들을 모두 바다에 버리게 될 위기에 처해 진겁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이미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몇 마리의 병든 소수 양 이외엔 죽지를 않더란 말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배는 쉬지 않고 달려 결국 호주 땅에 당도하니 수천 마리의 양들이 배에서 내리달려 땅의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먹지 않더니 갑자기 너무 잘 먹는 것입니다.

그때 지혜로운 양치기 한 사람이 그 이유를 알아차렸습니다. 바닷가 한 가운데서 이 양들이 바다에서 부는 바람 속에 살아 있는 풀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순간 양들의 뇌리에는 마른 풀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풀이 가득찼습니다. 그때부터는 양들은 마른 풀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 오는 진한 살아있는 풀 냄새에 희망과 소망을 싣고 배고픔을 이겨낸 것입니다. 물론 배고팠지만 더 좋은 것을 발견한 양들은 그보다 못한 것을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며 그 고난을 이겨 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더 산다면 천국은 하루 더 가까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천국이 보이십니까?

여러분 코에 천국 냄새가 나십니까?

 

그렇다면 아마 마른 풀 같은 존재엔 관심이 사라 질 것입니다.

돈보다 귀하고

건강보다 귀하고

명예보다 귀한 천국이 날로 가까워짐을 느낀다면

이 땅에서 그토록 목메고 바라던 모든 것들이 한낱 마른 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물며 미물인 양들도 좋고 나쁜 것을 아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린 양만도 못한 자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

여러분의 물질

그리고 여러분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 걸리적거리는 모든 장애물?

그것은 한낱 마른 풀에 불과합니다.

 

오직 우리의 관심은 천국에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