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갈릴리 캠퍼스로

by 관리자 posted Oct 20,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가자 갈릴리 캠퍼스로

누가복음 5장 1-11

 

2010년 7월11일 골드코스트 가까운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그들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공하는 학생은 좋은 선생을 만나야 한다.

또 아무리 좋은 선생을 만나도 그 교육 환경과 여건이 안 좋으면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공하는 학생은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은 물론 좋은 환경과 여건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 좋은 선생과 좋은 여건이 있어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 좋은 선생을 만났고 좋은 켐퍼스를 가졌다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셨던 갈릴리 캠퍼스!

그곳에서 제자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 사람을 살리는 법,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갔다

오늘 본문은 수석 제자격인 제자 베드로의 입학식 장면이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크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베드로는 실패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평생을 고기 잡는 일에 바친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해안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전문가의 수고가 여지없이 허물어 졌을 때

자신의 경력과 능력이 허물어 졌을 때

빈 배에서 허무한 신음을 하고 있을 때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1. 배를 육지에서 좀 떼어라.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권위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세상과 좀 떨어지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마다 항상 세상에서 좀 떨어지셨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려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셨다.

남들이 다 잠든 새벽에 제자들과 일어나 산에 올라 기도를 하셨다

늘 한적한 세상과 거리진 곳에서 기도하시며 세상을 바라 보셨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떨어 질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몇 가지만 살펴본다면

 

1) 이해관계에서 떨어지자

니가 이것 해 주었으니 내가 이것 해주는 거다라는 식의 공식은 절대적인 이해관계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이런 이해관계가 성립해서는 안 된다.

<수퍼를 경영하였던 미우라 아야꼬>

 

2) 감정관계에서 떨어지자

인간의 감정은 흔적을 남긴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그 감정을 걷잡을 수 없어서 초막 셋을 짓자고 나선다. 감정의 흔적을 남기자는 의미이다

 

또 싸우고 나서도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는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

 

나 이제 저사람 안 봐

나 이제 저사람 하고 밥 안 먹어

나 이젠 더 이상 그일 안 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영원히 지우기 싫은 흔적들을 스스로 맘 뼛속에 깊이 새긴다.

 

<쌍둥이 엄마와 유모 집사>

 

어느 교회에 쌍둥이를 둔 여집사가 한분 있었다.

워낙 약체에 쌍둥이까지 있어 교회에 나이 지긋한 여집사 한 분을 유모겸 가사 돌보미로 함께 있기로 했다.

마치 친정 어머니처럼 사이 좋게 지내며 한동안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주일부터 두 사람이 쌍둥이 하나씩을 안고 교회 양쪽 끝 의자에 갈라져서 앉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뭔 일이 있었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아이를 돌보다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여집사님이 심심풀이로 드라마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것이 취미였는데

그날도 쌍둥이 엄마는 약속이 있어 외출하고 여 집사는 늘 그랬듯이 드라마를 시텅하였는데

갑자기 아이가 넘어져 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울어도 집안 일을 돌보던 여집사는

늘 있는 일이니깐 별일 아니려니하며 계속 드라마를 시청했고 순간 하필 외출해서 돌아오던 쌍둥이 엄마가 이 광경을 본 것이다.

아이울음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티비만 보고있는 여집사에게 화가난 쌍둥이 엄마는 아이를 안으며

"늘 이런식이예요?" 라고 소리 질렀고 여집사는 "늘 이런식이라니? 아니 나를 어찌보고 그런 소리를 해? 내가 남의 집에서 애나 보고 있으니깐 우스워 보여?" 라며 맞받아쳤다.  

이 싸움은 급기아 교회로 번저 쌍둥이 엄마 편과 유모 집사편으로 교인이 갈라서게 되었고

서로의 편에서서 상대편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담임목사는 안 되겠다 싶어 두 사람을 불러다가 화해를 시켰고 사실 큰일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어색한 화해를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관계가 회복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자기 일도 아닌 남의 일로 편갈러 싸웠던 교인들은 다시 하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쪽 편들은 교회를 떠나는 비극적인 일이 생긴 것이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만 순간의 감정이 만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3) 권력관계에서 떨어지자

 

하나님은 권력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신이시며 자비의 신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사랑과 그 자비를 닮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권력에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손해만 보게 된다.

 

네 결혼 주례를 해 주신 김창인 목사께 어머니께서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간청에 노 목사님께서 "사람은(권세는) 멀리서 봐야 푸르고 멋있습니다. 힘있는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마세요"라고 하셨다. 그렇다. 사람을 가까이하면 힘있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2. 네가 고기 잡았던 곳이 어디냐?

 

이제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묻는다.

네가 어제 어디서 고기를 잡았느냐?

그곳으로 간 예수는 베드로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자고 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가야한다.

늘 놀던 곳에서 놀아서는 성장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얕은 신앙의 깊이는 늘 하던 대로 살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얇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여서 못가네....

더 깊은 곳으로 가야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는데

그곳에 가려니 겁이 난단 말이다.

작년에 하나님을 위해 1시간을 바쳤으면

올해는 1시간 1분이라도 더 바쳐야 하고

 

작년에 교회에 예배 5분전에 나왔으면

올해는 6분전에는 나와야하고

 

작년에 1명의 이웃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했으면

올해는 두 명의 이웃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하고

 

작년에는 하나님께 10불의 물질을 바쳤으면

올해는 11불 바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나는 줄 알고 난리를 친단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손을 잡고 깊은 바다로 가시자며

 

좀더 써라

좀더 수고해라

좀더 연구해라

좀더 순종해라

좀더 공부해라

좀더 전도해라

 

하시며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따라 한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 못 잡았는데 또 다시 그물을 내리라 하니 내립니다. 그러나 한번 보세요 고기가 있나” 라는 맘으로 그물을 내렸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았다.

예수의 명령이 맘에 안 들었지만 순종을 어쨌거나 했던 것이다.

 

어젯밤에는 예수가 계시지 않았던 배였다

어젯밤에는 베드로만의 능력과 힘을 의지했던 배였다

 

그러나 예수가 탄 후로 그 배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었다

예수와 함께하면 우리는 자연히 깊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 깊음 속에 승리가 있고

그 깊음 속에 참 진리와 생명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은 언제나 조금 더(Some more) 이다.

조금더 깊이, 조금더 멀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를 강조 하신다.

 

우리는 깊은 곳으로 가야 만 한다.

 

3. 나를 따르라

 

예수가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 이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고 하시자

베드로는 아침까지의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왕창 잡은 고기

회쳐먹지도 못하고

팔아서 돈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물과 배와 고기 모든 것들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게 된다.

 

베드로는 얻은 성공을 버렸다

베드로는 얻은 부귀를 버렸다

베드로는 얻은 기쁨을 버렸다

베드로는 얻은 소망을 버렸다

 

그것은 베드로가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한 풍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충만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이 넘쳐 흘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 바란다.

 

내 잔이 넘쳐야 흘러 남에게도 미치는 것이다

머릿속에 온통 계산기만 들어가지고 똑딱거리는 자들은 평생 맛보지 못하는 복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린 베드로는

알거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배에 유다에 많은 불신자를 가득 싣고 천국으로 항해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다.

 

자기의 잔이 흘러넘치니깐 이웃에게도 넘치게 하는 자가 되었단 말이다

 

<옛날 신학교 기숙사 화장실에 휴지와 다방에서의 설탕>

 

옛날 신학생 시절 학교 기숙사에는 휴지가 아닌 신문지만 널려 있던 적이 있었다.

한 장로님이 보시고는 ㅁ;래의 한국을 짊어지고 가실 신학도들이 이래서야 되겠냐며 화장실 휴지는 자신이 책임지겠노라며

그날 부터 화장지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화장실을 가보면 있어야 할 언제나 화장지는 언제나 없었다.

바로 화장지를 둘둘둘 말아 이주머니 저주머니에 넣어 몇일 쓸 분량을 미리 팽겨 두는 것이었다. 심지어 호장지를 통채로 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얼마 못가 그 장로님이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아무리 사다줘도 하루면 동이나는 화장지를 감당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이럴까?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각박했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줄것도 받을 것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어쩌다 다방에라도 갈 일이 생기면 커피한잔에 엽차 한잔 시키고 그 엽차 잔에 설탕을 부어 설텅물을 몇잔을 마셨나 모른다. 그 자리에 설탕이 다 떨어져야 그 다방을 나왔으니 얼마나 각박한 삶이었는지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는다.

 

<휴게실에 널려 있는 설탕과 프림>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누가 휴지를 몇일씩 사용할 분량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가?

휴게실에 설탕 프림 지천인데도 먹는 사람보다는 안 먹는 사람이 더 많다.

이젠 그 정도는 눈에 안 넣을 정도의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제 그 잔이 넘쳐야 이웃에게도 흐르지 겠는가?

 

ㄱ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넘치는 풍요가 우리 안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갈릴리 캠퍼스에서 참된 진리를 깨우쳐 귀한 제자의 삶을 실천하며 아름다운 축복의 삶을 산 것처럼

오늘 여러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이 제단에서 외치고 가르치는 모든 말씀과 지식을 열심히 깨우쳐 주님 앞에서 베드로처럼 유익한 종들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