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2015.10.25 10:02

내가 목마르다

조회 수 32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장 28-30

 

이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 일곱 마디를 말씀하신 중 다섯 번째 말씀이셨다. 예수님의 말씀의 출처는 늘 그러하셨듯이 사사로운 말씀이나 사설을 말씀치 않으시고 성경에서 인용하신 말씀 아니면 말씀에서 예언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들이 대 부분이다.

 

이 말씀은 시편 69편 3절에서 이미 예언 된 내용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 하였나이다”

이미 시편의 기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목마름을 예언하였다면

그렇다면 예수의 이 목마름은 결코 육체적 갈증을 호소한 목마름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갈보리 산위의 십자가 위에서 그 뜨거운 햇살을 피할 그늘도 없이 몸의 피를 계속 쏟아 놓으며 목이 갈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지경 속에서 육체의 갈증이 아닌 다른 갈증이라면 이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과 시편을 연결시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은 그 갈증의 의미를 잘 깨닫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마름은 ;

 

1. 첫째, 예수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갈증 이었다. 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후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토록 하나님의 정의와 바른 길을 설파하고 인도하였으나 그것을 깨닫기는커녕 그러한 자신을 죽이지 못해 몸살 나는 저들을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인류를 살리려는 아름다운 목 마름으로 이것은 거룩한 목마름인 것이다.

 

바울은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 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립보서 1장19절)”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의 최고 의 은혜는 예수와 함께 목마름에 동참하는 것에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목마름이 나의 목마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최고의 은혜라는 말이다. 이 거룩한 갈증, 즉 십자가의 고통은 곧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의 능력을 보고 그러한 능력의 결과 예수께서 이 세상을 지배 할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린 자들에게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14:27)”고 하 셨다. 그 자기의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께서 흘리시는 권력과 명예의 부스러기를 주어 가지라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수많은 자기 의 것을 모두 내어 놓는 무소유 의식을 마땅히 치러야 하는 이 고통을 감수하며 나아가 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빼앗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부패

하고 망가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위와 재산과 가족과 명예 등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온갖 것들이 다 있을 것 이다. 이것을 하나님과 그 나라 확장 사역에 아름답게 쓰여 질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는 성도의 나아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려면 이 거룩한 갈증을 반드시 맛보기 마련이며 그 후에 비로서 참 성도가 되는 것이다.

 

2. 둘째, 예수의 목마름은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수히 내 원수 가 되어 나를 끊으려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거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 다.(시편 69편4절)”에서 나타난 바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증오와 오해로 둘러싸인다.

늘 예수께서도 머리털 보다 많은 무고한 자들의 미움의 숲에 내던저지는 고독한 삶을 사 셨다.

계속된 시편의 기자는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 다(시69:8)”고 예언함으로써 가족도 심지어 형제들에게 까지도 외면당하는 극심한 오해 와 증오의 늪에서 예수가 느끼는 갈증은 거룩한 고독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부름에 나아가는 자들은 세상의 부름에는 강한 단절이 있어야 하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기에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끼이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도 따라 살고 싶고 세상의 욕심도 거절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갈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세상에서 버림 받아 고독한 우리의 모습은 예수께서 맛본 거룩한 고독임에 틀림 없다.

내가 내 욕심 쪽으로 기울어 살면 근심과 고민도 없다.

예수를 내 뒤로 쫓아오게 하고 내 필요한 곳에서만 세워두고 이용하려 든다면 누구랑 싸 울 것도 없고 또 욕먹을 일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나의 삶에 앞에 모시게 되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사이에 끼게 된다.

그 두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성도들의 위치는 늘 사이에 끼인다. " I am trapped in the middle"

 

정의와 불의의 사이에서

쾌락과 고통의 사이에서

주님과 친구의 사이에서

진리와 거짓의 사이에서

나태와 사역의 사이에서

말씀과 궤변의 사이에서

 

우리는 늘 끼어 산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거룩한 고독의 싸움인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얼마나 내 가슴에 그리스도 때문에 많은 상처의 흔적을 남겼던 고 독이었던가?

그것이 바로 오늘 주님이 목말라하는 거룩한 고독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이란 이 거룩한 고독에서 회피하여 도망하는 것이다.

 

괴로워 할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높은 수준인 줄 아는가?

 

비판은 가장 저급하고 낮은 삶의 수준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 하셨다.

수수방관은 가장 무의미한 삶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존재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이다.

 

지금도 괴로워 할 줄 모르고

“이 길로 가든 저 길로 가든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이런 사람은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3. 셋째, 예수의 목마름은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 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 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0-21)”에서 예언 한대로 좌우를 둘러보아도 도와줄 자도 없고 위로해줄 자도 보이지 않는 형편에서 오로지 이 일은 혼자 완전히 해결해야 만 하는 극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더욱이 마시고 먹을 수 없는 쓸개와 초는 스스로 취하기보단 강제적으로 마시우고 먹이 어 조롱과 수치심을 자아내는 일련의 행위로 결국 하나님께서도 돕지 않고 버리시는 것 일까 함을 느끼는 갈증과 목마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하신 네 번 째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일도 천상천하에 단 나 혼자라면 두려움이 따르게 된다.

여기서 진정한 인간 예수를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러나 원수 같은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한 고로 자신이 마셔야 할 이 쓴잔을 거부 할 수 는 없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 마셨던 쓸개와 초는 우리의 모든 죄의 분량을 단번에 마셔 버린 거룩한 헌신 이었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마치 꿀물을 먹는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리며 불길 같은 진노도 타오를 수 있다.

왜 용서는 아름다운데 그토록 고통이 동반 될까?

 

우선은 자존심 때문에 용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존심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자존심이 꾸겨질 때 어떤 이는 자살까지 한다.

 

용서하면 또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이 참에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것이다.

그럼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인가?

버릇을 고쳐 주겠다는 것은 구실이고 분풀이를 하겠다는 말이 정답이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용서보다는 체벌이 낫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식을 때려 교육하라 했고

잘못 된 눈이 되기보다는 뽑아 없애는 게 낫다고 했고

잘못을 저지르는 손은 찍어 버리라고 했다

차라리 온전치 못한 불구라도 천국을 위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들은 나름대로 이유 있는 변명이라고 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헌신의 마음이 없이 용서하려하기 때문이다.

헌신은 무조건 적인 사랑이 근본이다.

그 헌신은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번에 못 가르치면 영원히 버릇을 고칠 수 없다는 핑계로 분풀이 하지 않는다.

내 잘못이라고 그의 잘못을 나로 화해시키고 나로 용서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한 잘못이든 아니든 간에

내가 그 문제를 대신 맞으므로 해결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이 무조건 적인 사랑이 예수에게는 너무나 가득 찼기에 그 고난의 잔을 거룩한 헌신으로 승화시키며 마셨던 것이다.

 

이란에는 40만명의 자위대가 있는데 바로 12세~16세의 소년 소녀로 이슬람교에 세뇌된 어린 청소년들이다. 훈련도 받지 못하고 군장과 군복도 없이 들기에도 버거운 총을 들고 있는 그들은 티셔쓰 한 장씩을 입고 있는데 등에는 한결같이 “순교자”라고 써 있는 셔쓰를 입고 있다.

그리고 왠일인지 언제 죽을지도 모를 그들의 표정엔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오직 자랑스럽게 당당하고 기쁘고 용기백배한 표정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신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내 영혼을 위하여 너무 기쁘고 자랑스런 이 해야 할 일을 당당히 하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이슬람교도 아이들만 한 순교자들이 우리 기독교 안에도 있을까?

 

“내가 목마르다며 부르짖은 예수의 갈증은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거룩한 갈증이며 주어진 길만을 좌우로 돌아보지 않고 똑 바로 걸어가는 거룩한 고독이었으며 우리가 마셔야 할 죄 값의 잔을 대신 마신 거룩한 헌신이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