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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2015.10.25 08:43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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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요1장 43-46

 

2012년 4월 1일 골드코스트 가까운교회 주일 낮

 

오늘은 전도의 기본적인 마인드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과 나라와 심지어 지방은 표현 방식과 생각과 가치기준이 다 다르다.

특히 시대적인 의미에서는 더 다르다.

옛날에는 크던 것이 지금은 작다. 시대적인 가치가 변해서이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 적용과 응용이 변화한다.

그리고 다른 민족의 문화와 관습의 중요성도 충분히 반영되게 되어 있다.

 

동야의 문화를 서양에 와서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도 자체가 실패이다.

한국이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을 했다고 해서 서양에 와서 한국 스타일로 서양인들에게 적용하려 한다면 절대 한국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역시 서양의 놀라운 전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서양 스타일로 전도 대회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서양처럼 효과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예를 들어 본다면

 

오늘 성경에 보면 빌립이 니고데모에게 예수를 증거하자 니고데모는 한낱 촌 동네 나사렛 출신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며 절망스런 말을 하자 빌립은 굴하지 않고 단 한마디 “와보라”라고 외친다.

 

당시 빌립은 너와 내가 아닌 제 3자를 보라라는 자신감을 내 비치었다.

이 말은 네가 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이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소개였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적과 기사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능력의 말씀

그동안 제시 받지 못했던 내일의 비젼을 그 어떤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빌립이 소개하여 나다나엘이 봐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럼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

2000년이 지난 오늘 날도 무조건 와보라고 해야 할까?

 

예수님 당시야 당연히 예수님을 볼 수 있었으니깐 당연히 직접적 지시인 “와보라”라고 그렇게 외 칠 수 있다지만 지금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은 직접적 지시가 아닌 간접적 지시가 되어야 한다.

그 예수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젠 예수를 보 것 같은 효과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누구겠는가? 과연 누굴 내가 100% 믿고 추천 할 수 있겠는가?

 

바로 나를 말한다.

 

와서 봐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말을 하는 나이어야 한다.

 

예수 때문에 변한 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다시 산 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성공한 나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를 나를 통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웃에게 전도하며 우리교회를 와 보라의 의미는

 

우리교회 목사님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 장로님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의 건물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라는 말이다.

네 앞에서 감히 예수를 당당히 전하는 나를 보란 말이다.

내가 너를 가르치고 너를 인도 할 선생이란 말이다.

 

내가 예수를 닮은 바로 그 사람이므로 다른데 보지 말고 다른 곳 눈 돌리지 말고 바로 나를 보라는 것이다. 바로 내가 예수의 형상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전도이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인드이어야 한다.

 

장군이 전쟁에 나가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 네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 봤나?

너도 나도 제대로 된 일선의 장군들은 나를 따르라고 하지 네 가까운 곁에 있는 장군을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나를 본받아 예수를 믿어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간혹 보면 많은 교인들이 “난 내가 다니는 교회 나오라고 하지 않고 너희 집 가까운 곳에 나가라고 한다.”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그 의미가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그것은 진정한 전도인이 아니다.

 

자식을 낳고는 “너를 잘 키워 줄 수 있는 부모를 찾아가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출산은 양육의 책임을 수반하는 것처럼 전도도 양육의 책임이 있다.

네 가까운 교회로 그 책임을 전가하면 안 된다.

불신자를 전도함에 있어서 최고의 꽃은 양육이다.

그 양육을 다른 곳에 위탁하는 자가 어찌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도 있다.

심지어 교회에 나가는 것은 좋지만 우리교회 오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도 있다.

자신을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와서 보면 창피하기 때문이다.

와서 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을 지금 비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부터라도 와서 나를 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 배우고 그러기 위해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나

오다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볼 것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띄게 되어 있다. 보여 지게 되어 있다.

 

예수를 닮은 사람은 자신이 숨어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구태여 보이려하지 않아도 나타나려 하지 않아도 자랑하지 않아도 보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진정한 전도인은

 

기쁜 소식을 담은 편지와 같고

악취가 풍기는 세상에서 향기와 같고

어둠이 만연한 죄악 된 세상에서 영롱한 햇살과도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와보라고 말한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이런 전도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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