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

by 관리자 posted Ja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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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0일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

야고보서 2장 14∼22절

 

성도들의 멈추지 않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삶이 진정한 신앙의 삶이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삶인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삶의 모습이 그 정답이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시고 우리 주변 인물들 가운데 그런 참된 신앙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기 원하는 자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보이지 않죠?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찾는 참된 신앙의 모습을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하고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그런 이상스런 현상들을 기대하는 자들도 많습니다만은 그것은 신앙과 성경을 너무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주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찾는다면 영원히 못 찾는 것처럼 신앙의 본질은 성경에서 말하고 가르치는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찾는 것입니다. 결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무 개념 성경해석에서 파생되어 성도들의 환경과 처지에 맞게 가져다 붙이는 식의 만능무속신앙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정체와 실체를 바로 갖고 살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념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의지와 경험과 노략을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지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의지의 대상은 자신입니다. 그 의지로 주님을 따르니깐 실망이 오는 것입니다.

의지는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대가가 오지 않으면 그 의지는 곧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잠재시키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돈과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용되어 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도 두 가지 목적으로 나뉘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세워달라며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는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 못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는 뜻을 위해 이 몸을 드린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그런 여자였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에 마리아는 자신의 명예나 신분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의 종이오니 그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당차고 깔끔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이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구분이 잘 안 간다면 가장 흔한 예로 자신의 수입에 십일조는 아까워서 못 드리면서 하나님께는 무조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아까우시겠어요? 네 것, 내 것도 구분 못하는 그런 셈이 부족한 사람에게 글쎄요? 물질을 복을 주실까요? 어때요 판단하기 쉽지요? 성경은 이렇게 모든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분을 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서는 믿음을 세 부류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정만 앞서고 행동은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단순히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믿음입니다. 없어도 되는 그런 믿음이란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면서 동정심만 느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 입은 옷과 음식을 주지 않는 다면 그 동정심은 굶주린 자에게 아무 의미 없는 한낱 감정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17절)”라고 성경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만으로, 말로만 하는 믿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감정은 느낌일 뿐 표현하지 못하면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을 지식이나 지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 성도들보다 해박합니다. 광야에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내 생활에 도입하여 생활화될 때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내 맘에 심어야 내 삶에 뿌리를 내려야 그것이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66권 성경을 다 외운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란 말이 있습니다.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행동하기 위함이지 절대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셋째, 따르고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믿음을 가졌던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100년간 살아오면서 구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한다면 반드시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그 사랑, 그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어 결국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채워주신 하나님,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고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망하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드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모습은 부자가 아니고 지식이 많은 유식한 자람이 아니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분들이 아니고 단 한 줄이라도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그런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비교적 그런 사람들은 지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비교적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쉽게 찾을 수가 없지요. 아니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을 찾는 헛된 시간을 보내느니 내가 행동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행동하는 믿음이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행동을 위해 있는 것이지 내 맘 안에 신념으로 머무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 구원시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안에 이런 믿음의 흔적이 보여 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과 삶이 따로 놀지 않고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물질로, 학문으로, 명예를 위해 가짜로 치장하는 믿음의 가면을 쓴 위선자들이 아닌 비록 가진 것 없는 자로서 비천하지만 비록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지만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지위는 없지만 한 순간 한 순간 말씀이 내 삶 안에서 지시하는 작은 일들부터 실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