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순

by 관리자 posted Jun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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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순

 

마가복음 5장 21∼34절

 

새들은 보통 6∼10개의 알을 낳는데 이 중 절반 가까이는 부화된 뒤 영양실조에 걸려 죽는다고 합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왔을 때 다른 새끼들에 비해 입을 크게 벌리지 못해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새들이 바로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잘 자라는 새끼들은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올 때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목청껏 소리를 내면서 앞장서 적극적으로 먹이를 구합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줄 때 첫 번째 선택은 입을 크게 벌리는 순서대로랍니다. 어떤 새끼가 더 먹기를 간절히 원하는가가 바로 어미의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에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데려갈 때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살고 싶어하는 열정이 없고 병들어 허약한 그런 사람을 우선 데려갔다고 합니다. 나는 살아야 겠다며 눈에 독기를 품은 자들은 그나마 손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몇 유대인들은 깨진 병조각으로 면도를 했으며 천조각하나 종이 한 장이라도 있으면 버리지 않고 몸에 두르며 한파를 이겨냈고 살기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자들은 대부분 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회당장이라면 당연히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언제고 호시탐탐 예수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회당장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회당장이라고 권세만 부리는 자가 아닙니다. 대중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으면 언제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 바리새인의 딸이 죽을병에 걸리자 의외로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죽어가는 내 딸을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님을 찾아와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의 간구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예수께서는 그의 간절함에 감동하셔서 그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군대라는 떼 귀신이 들어간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힘이 좋은지 쇠사슬을 끊고 제 몸을 돌로 쳐서 상하게 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사람을 예수께서 단 한마디로 고칩니다. 그러자 그 귀신이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 그 돼지 떼들이 바다로 뛰어 들어 몰살하는 일이 생겼었습니다. 그 일 이후 예수의 모습만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장당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실 때도 수많은 이들이 길에 나와 예수의 앞에 모여 또 예수가 어떤 일을 행하려나 구경을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빨리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때 회당장 야이로의 맘은 어땠을까요?

죽어가는 딸이 기다리고 있는데 서둘러 가야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마음 같으면 인파들을 확 밀어버리고 예수님을 업고서라도 당장 달려가고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덥친다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에게 새치기한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술 더 뜨십니다.

 

이 바쁜 와중에 가던 길을 멈추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고 물으십니다.

아니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만지고 떠밀고 밀치는 가운데 누가 예수의 몸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황당해 합니다. 아니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것처럼 그냥 만지고 싶은 무리들의 손이 아니라 “간절한 소원을 가진 믿음의 손이 나를 만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환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것도 힘들텐데 그 인파 사이로 파고들어 예수님을 만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그 여인을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34절)라고 치유는 물론 놀라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촌각을 다투는 죽어가는 어린 여아에게 가는 중에 무엇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까요. 여인의 간절한 간구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즉 성도들은 간구와 믿음이 언제나 함께 갑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간구는 혼자 가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 순서 즉 축복의 순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 많고 지위 높은 회당장 / 신분이 비천한 병든 여인

 

예수님을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같으면 누구에게 우선순위를 둘 것입니까?

막상 눈앞에 보이기는 예수께서 이 여인 앞에 지체를 하시는 것을 보면 여인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급한 순서대로, 혹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순서대로 일을 합니다.

상대방의 요청에 “이것부터 해놓고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도 여인에게 “지금 회당장 딸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그 아이부터 살리고 네 이야기 들어줄게”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서는 눈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입니다.

 

급한 순서도, 중요한 순서도 별로 따지지 않는 것 같게 눈앞에 보이는 대로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혈루병 환자가 나았거든요. 근데 바로 그 순간 야이로의 집에서는 딸이 죽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변입니까?

 

길에서 시간을 끌게 한 혈루 병 환자가 야이로의 딸을 죽게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분통이 터졌을 런지도 모릅니다.

야이로는 이건 선착순에 위배된다고 소리지르며 예수님의 멱살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묵묵히 더 이상 말도 없이 가십니다.

야이로도 기가막힌 상황에서 묵묵히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만류도 무시한 채 묵묵히 가십니다.

그리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고 그 시체 앞에서 하신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며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십니다.

 

참 놀 날 일입니다. 기적이지요. 죽은 줄 알았던 소녀가 건강히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 기사들은 기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적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누구의 능력이 아닌 본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딸이 나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믿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나을 것이라는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믿음

바로 그런 믿음들이 이 모든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로써 딸의 생명은 야이로의 믿음이 살린 것이며

예수님은 자는 자를 깨우신 것이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의 조건은 우선순위가 아니고 직분과 지위의 순서가 아니고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믿음을 갖은 자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춰볼까요?

 

현재의 고통과 불편을 극복하기 원하면서도 불평과 원망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걷기도 힘든 혈루병을 앓는 여인은 그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나가는 도중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원망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자식의 죽음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자꾸지체하는 예수님의 행보에 속터질 만도 한 야이로는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이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가지고 비판과 원망과 한숨이 나올 만도 한데 성경에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인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기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나에게 오는 기적을 / 우리가정에 오는 기적을 / 우리 교회에 오는 기적을

 

바로 나의 원망과 불평이 가로 막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바로 내 입의 원망과 불평입니다. 나름 이유가 있다지만 대부분 오해이고 편견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나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포함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한명의 불평과 원망은 결국 주변 사람을 서서히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리 안에는 언제나 물과 기름처럼 불평하는 무리와 감사하는 무리로 나눠지지 않습니까?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조건에서 감사하는 무리와 불평하는 무리는 언제나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고 감사가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속 된 조건과 시각으로만 보니 그런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딸의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 만 주님의 옷자락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변사람 뭐라하던 예수만이 나의 딸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은 선착순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런 나의 믿음이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순간 여러분의 일상은 기적의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불행한 여러분의 삶이 행복으로 바뀌어 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