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조회 수 9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령 Series 2 성령의 교제 사도행전 2:38-47

 

사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모여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에 필요한 부분을 교회에서 배워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위해 학교를 가는 걸까요? 미래의 내 삶을 위해 학교를 가는 것일까요? 답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실 겁니다. 내 삶을 위해 학교가 필요한 것이지 학교를 위해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해 예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가 되기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이 문제는 기독교의 본질을 확실히 하는 사건들로 나타납니다. 제사를 드리고 구약의 성경을 연구하고 늘 회당에서 율법과 함께 아브라함부터 전승되어 온 유대 규례에 공부하고 열심이던 유대인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성령은 가히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바로 단 한 번도 율법에서 다뤄보지 못했던 성도 간의 교제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법을 지키는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법을 어긴 자들을 법을 지키는 자들이 용서할 수 있어야 그 법을 지키는 의미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죄인을 받아야 온전한 의인으로써의 면모를 갖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박용재라는 시인이 쓴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사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혼식 때마다 제가 신랑, 신부에게 설교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좋을 때 시작하는 것이지만 사랑을 지키는 것은 미울 때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하면 이혼이지요. 그런데 한 번도 지켜보지 못한 사랑을 사람이 바뀐다고 지켜질까요? 실패를 상대 때문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래서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랑으로 비유되고 신부는 성도들로 비유되곤 합니다. 교회에 나온 성도들이 100% 만족할까요? 교회에 나온 이유와 목적을 100% 성취하셨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교회 나오면 골치 아픈 일이 더 많지 않나요?

교회에 나와보니 보기 싫은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지 않나요?

교회에 나오면 만사가 형통할 줄 알았는데 주일 헌금 하는 것도 아까울 정도 아닌가요?

짐을 덜어버리고 후련하게 살고 싶었는데 더 많은 짐보따리를 짊어진 것 같지는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마치 결혼 같아서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면, 막상 해 보면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이 더 많구요 기쁜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더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혼하듯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느냐 하는 질문에 결론적인 답은 교회의 제도가 성도 간의 교제를 오히려 극심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도 당연히 성도 간의 교제 중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그 배운 말씀을 삶에 실천하는 일에 대해선 벙어리나 앉은뱅이나 소경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의 가장 큰 이중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의 실질적 행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목사의 설교와 목사의 삶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의 모형을 논하면서 정작 성도들의 가정의 모습은 지옥을 방불케 하고 심지어 목사들의 가정까지도 엉망진창인 가정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자꾸 교회를 떠나 여러 선교단체에 속하는지 아십니까? 삶의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가 단절되고 예배와 기도회와 회의만 판치는 교회에선 기독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교제는 찾아보기 힘든 반면에 각종 선교단체는 눈에 보이리만큼 단체 안팎에서 교제가 이어짐을 쉽게 비교하여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교제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본 후 우리도 그런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하나가 되어 풍성한 성도의 삶을 누리기를 먼저 축원합니다.

 

먼저 초대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도 지속되는 로마의 만만치 않은 정치적 식민 정책과 유대인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종교박해를 피해 아주 극심하게 어려운 신앙생활을 이어갈 때였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성도로써의 비참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가는 처지였습니다.

 

그때 성경이 소개하는 장면을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펼쳐지는 각종 은사들이 성도들을 장악했고 더불어 성도들은 모두가 한 맘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했습니다. 네 것과 내 것이 없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각자의 가정에서 성도들을 초대하여 기쁨과 순전한 맘으로 음식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믿는 사람들만이 아닌 자신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불신자들에게까지 이들의 사랑이 파도처럼 미쳤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만 하고 예배만 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죄인들이라고 정죄하고 자신들과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선을 긋기에 바빴던 유대인들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이런 것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 속에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꽃은 누가 뭐래도 바로 교제였습니다. 모이면 율법과 규례를 잘 지키는 것을 서로에게 자랑하여 누가 큰지를 언제나 재보던 모습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자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신 후 달라진 교회였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1. 교제는 평화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좋을 때 나누는 교제는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이 불편해할 때 내 처지 상관 안 하고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불편할 때 남들 돌보지 못하는 것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 상식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럴수록 교제로 소통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는 좋을 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불행할 때 더욱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프니깐, 지금은 복잡하니깐, 지금은 바쁘니깐 교제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마귀의 계략입니다. 지금이 딱 적기인 것을 간파한 마귀의 계략은 언제나 지금은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너부터 챙기고 너부터 먹고, 너부터 살고 나서라고 모든 것을 뒤로 미루게 합니다. 세속적인 삶은 이것이 상식일지언정 바른 성도의 모습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제는 고난 속일지라도 멈추지 않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형 틀 위에서 마지막 가뿐 숨을 힘겹게 쉬면서도 죄인들의 저 무자비한 죄는 몰라서이니 용서해달라는 그 중보의 기도 핵심은 너나 챙겨보라는 비난과 조롱을 충분히 이기도고 남는 그런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교제의 원료라 할 수 있는 사랑만 있다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성도 간의 교제는 가능한 것입니다.

 

2. 또 하나의 특징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뜻으로 뭉쳐졌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 교회를 이룬 사람들이 나오는데 너무 다양합니다. 우선 가롯 유다를 제외한 11제자가 있습니다. 마리아 같은 여자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아우들도 있습니다. 12제자만 해도 얼마나 다양합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어부입니다. 마태는 세리, 셀룻인 시몬은 자살한 가롯유다와 같은 열심당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극우파 테러리스트입니다. 사상적으로 보면 극우에서 극좌까지, 신분으로 보면 농부, 어부, 공무원 서로 다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 아우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이들이 다 하나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순절입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을 성경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 그레데인은 크레타섬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중동 아랍지역에서도 왔습니다.지역만 다를까요? 문화도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사고방식, 가치관, 사회적 신분도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하나 되게 했습니까? 바로 성령님입니다. 누가 노력한 흔적도 없었는데 바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안디옥교회가 나옵니다. 거기에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오는 데 이들도 정말 다양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한 세대나 차이가 납니다. 헤롯의 젖동생은 왕족이고 다른 사람은 평민입니다. 신분적 차이가 있습니다. 시므온은 흑인이었고, 루기오는 구레네 지금의 리비아에서 온 사람입니다. 지역적으로, 신분적으로, 나이에 있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지중해 섬인 키프러스에서 자라났고, 바울은 로마의 영토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나바는 기질로 말하면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바울은 다혈질이었고, 혈액형으로 말하면 바나바는 0형, 바울은 AB형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인심 좋은 이웃 사람 같았고, 바울은 날카로운 혁명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성령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 교제를 하게 하시고 다양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은 성령님에 대한 성경의 비유에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모성성 입니다.

 

성령님은 모성의 하나님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고 기르며 무한한 사랑으로 돌봅니다. 자식들이 많고 서로 달라도 한 어머니인지라 어머니가 있는 한 자식들은 하나입니다. 형제간 다툼이 생겨도 어머니는 안타까운 맘으로 언제나 형제들의 화해를 도모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안에는 성령의 돌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모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유 없이 용서할 수 있고,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있고, 이유 없이 나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으로 내가 충만해야지만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도 좋지만 나를 욕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불성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불로 비유합니다. 불이 성령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불은 태웁니다. 불은 소멸시킵니다. 불은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화시켜 순수한 것만 남게 합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깨끗한 정금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같은 성령의 불이 우리 속에 붙으면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 욕심, 경쟁심, 미움 등의 불순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기심과 정욕과 야욕으로 가득찬 더러운 눈으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환경과 타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있는 자아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내려놓으면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폴 베어 브라이언트라는 사람이 삶의 승리를 위해 세 가지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나쁜 일이 생길 때는 “나 때문이야,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길 때는 “너 때문이야, 네가 있어줘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느닷없는 불행이 발생하면 “이만해서 다행이야. 너무 감사하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한마디는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아주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금도 불행 속에서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슬픔 속에서 아파하는 이웃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지 않습니까?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작정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해도 왜 인생이 풀리지 않는 줄 아십니까? 성도 간의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만 필요한 교회용 신앙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교제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교제는 많은 시간과 정력과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교제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교제를 원하시고 교제하게 하십니다. 특히 어려울 때 그렇습니다. 힘들 때 그렇습니다. 평안할 때는 생각도 안 나던 사람이 고통스러울땐 생각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기분 나쁘고 속상하고 이게 누굴 봉으로 보나 하는 맘이 불길처럼 솟구치기도 하지만 이것은 교제를 분부하시는 성령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언제나 성령이 이끄시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성령 Series 2 성령의 교제 관리자 2019.01.16 93
113 신년 메시지 관리자 2019.01.16 80
112 성도의 자태 Series 15 남다른 권세를 지닌 삶 관리자 2018.12.28 106
111 성도의 자태 Series 14 반석 위에 세운 집 관리자 2018.12.19 89
110 성도의 자태 Series 13 영향을 주는 삶 관리자 2018.12.12 148
109 성도의 자태 Series 12 리드하는 삶 관리자 2018.12.12 88
108 성도의 자태 Series 11 먼저 구하는 삶 관리자 2018.12.12 63
107 성도의 자태 Series 10 성찰의 삶 관리자 2018.11.20 64
106 성도의 자태 Series 9 의롭게 사는 삶 관리자 2018.11.11 64
105 성도의 자태 Series 8 은밀한 삶 관리자 2018.11.11 72
104 성도의 자태 Series 7 선하게 사는 삶 관리자 2018.11.01 67
103 수고와 상급 관리자 2018.11.01 68
102 주님의 당부 관리자 2018.10.24 66
101 성도의 자태 Series 6 책임지는 삶 관리자 2018.10.07 69
100 성도의 자태 Series 5 성결한 삶 관리자 2018.09.30 72
99 버림의 미학 관리자 2018.09.23 80
98 성도의 자태 Series 4 화목의 삶 관리자 2018.09.21 81
97 성도의 자태 Series 3 증인의 삶을 사는 성도 관리자 2018.09.21 76
96 성도의 자태 Series 2 빛으로 사는 성도 관리자 2018.09.21 76
95 소원의 항구 관리자 2018.08.31 9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