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자태 Series 15 남다른 권세를 지닌 삶

by 관리자 posted Dec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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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태 Series 15 남다른 권세를 지닌 삶

 

산상보훈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르치는 중에 또는 마친 후에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권위가 남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에도 수많은 유명 설교자와 율법학자와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와 같은 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권위는 2가지입니다.

 

● 카리스마 : 이것은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힘, 실력, 탁월한 지도력 등을 말합니다.

● 퓨뉴마 : 이것은 충만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혀 없어도 마치 나의 주인 같은 힘

 

오늘 이 권세는 두 번째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모든 말이나 행동들에서 신뢰도 100%가 느껴진다는 그런 권위를 말합니다.

 

 만일 신들린 것처럼 흥분되고 마취된 것처럼 무아지경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권 위가 아니라 전달의 요령 때문입니다.

 

 아~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숨겨진 내용을 찾아 밝히는 것 때문입니다.

 

 혼이 빠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는 틀림없는 숙련된 화술 때문입니다.

 

 내용에 관계없이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무장된 스팩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그것들과는 달랐다는 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의 권세 자들이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누가 우위냐를 가늠하는 그런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대중의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마나한 가르침,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전혀 상관없는 가르침, 예수께서는 그런 가르침을 무식한 변론이라고 하셨는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바로 하나마나한 그런 가르침만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의 주제는 흔한 우리 삶의 내용이며 언제나 직면하고 있는 대중들의 삶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관심을 갖을 수밖에 없었고 그 가르침 속에서 너무나 쉽게 문제의 답들을 찾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권위의 핵심입니다.

 

● 우리는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사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

예수님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먹고 왜 입고 왜 사느냐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높아지고 명예를 갖고 유명한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데

예수님은 높아지고 유명해지면 뭘 어쩌려고 하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내가 잘 되고 내 가정이 잘 되고 내 자식이 잘되고 내 교회가 잘되고 내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이기고 잘 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예수님은 모든 국가와 인류는 한 지체이니 서로 나누고 배려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잘되고 싶어 교회 나오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목사를 만났지만 이렇게 예수님처럼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의 원인을 짚어주면서 드러난 문제가 아닌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어 우리 삶의 문제들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 교회나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나 칼빈이 아닌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의 최우선 과제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성경을 직접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들을 자유롭게 듣고 읽고 쓰게 하는 것에 우선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각국 언어로 된 성경번역의 불씨를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을 권세 높은 교황들이나 열광적인 예언자들이나 위세 높은 교부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그들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당당히 거부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말씀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어 개인들에게 기도와 찬송이 되살아 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회복된 복음의 권위입니다.

 

오늘날은 기도 안 한다고 해서 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서 벌금을 내지 않습니다. 헌금하지 않는다 하여서 백성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세 타락한 교회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기도 안 하고 교회 안 나가고 헌금 안 하면 속에 마녀가 들어갔다고 해서 공개로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앙 안에서 영적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교회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할 정도 였습니다.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세례받지 못한 자들이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를 집례하는 성직자들의 교만과 권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성직자들의 권세에 눌려 살면서도 그들을 권위있는 자들로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은 중세말기의 타락한 교회를 정화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교훈 삼아서 전 국가적으로 진리를 따라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교회만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독일을 살려냈고, 쯔빙글리와 칼빈은 스위스를 구했으며, 낙스는 영국을 혼란에서 구해냈습니다. 프랑스에선 기독교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는데 위그노 대학살을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위그노들의 희생과 인내로 부패한 프랑스 왕권의 횡포를 잠재시키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정화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의 최고 절정에 이른 나라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한 나라의 공주가 자신의 결혼식 날 밤에 길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성과 성관계를 자유롭게 맺을 정도였으며 신분이 높은 귀족들은 날마다 이어지는 연회에서 누구의 아내인지 누구의 남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혼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의 결혼은 지위와 재산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여왕 마고”를 보게 되면 그 시대상을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중세말기 극심하게 타락한 가톨릭의 성례주의를 파하고, 교회 중심의 온건한 변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막기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중들은 세상을 바꿔놓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말씀들을 증거하고 연구하고 선포하는 성직자들에게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말씀에 대한 권위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떨까요? 변혁이 불필요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라는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바라볼 때 교회가 이렇게 두 손 놓고 있다가는 불행한 미래가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들은 힘이 있고 역동적이며 매우 능동적인 공격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따라가야 할 권위자, 즉 지도자를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김구에게는 조만식이 있었고 디모데에게는 바울이 있었으며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도자들의 권위 아래 자신들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데 요즘 젊은이들에는 그런 지도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권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들을 어거할 수 있는 권위가 먼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는데 바로 성도들의 손에 쥐어 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성령은 성경을 사용하여 사회를 망치고 타락시키는 대적자들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착취하고 있는 것들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인격 속에 새로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씨앗을 심어놓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모두 다 교회들을 위해서 보내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온 것들이기에 오류가 없고, 잘못된 것이나 거짓이 전혀 없는 순수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힘이 아닌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것만이 그들을 가르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수준 이상으로 탁월한 실력과 신앙과 열정을 갖춰야만 하고 진정한 성경적 권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중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기독적 인간의 정확한 이해는 전적부패입니다. 부패한 인간으로부터는 신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아무리 감추어도 냄새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부패하였다고 보고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것과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고 믿고 시작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부패를 괘씸하게, 불쾌하게, 더럽게 본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본 것입니다. 마치 병을 얻은 환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람의 본질을 알고 대한다면 이상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5대 교리를 주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의 전적부패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적부패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가져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참회의 고백 차원에서 이해되었고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와 그 이상의 변화즉 거듭나게 하기 위한 교리적인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므로 거짓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살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기치는 것이 당연하다, 배우자를 놔두고 바람피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질 않았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도 법이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 사람은 변함이 없어라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립서비스에 불과한 소리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너 나 할 것 없이 우린 이런 본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예수께서는 어떻게하셨는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 삶의 핵심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이해와 섬김이 있는 삶

 

예수님은 결코 말로만 대중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는 먼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먼저 굶주린 많은 대중들을 배불리 먹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전하셨습니다. 소망과 현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믿음은 현실의 것이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를 말씀하실 때는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낮아지심의 진수를 보이셨고, 사람들이 낮고 천하게 보는 세관직원들과 창녀들과 죄인들을 주로 만나 보시면서 그들이 그렇지 않는 자들과 별로 차이가 없음을 은밀한 가운데 보여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는 죄를 지은 여자를 죽이기 위해 돌을 든 대중들에게 “죄 없는 자는 던져라”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이 여자처럼 간음하지 않은 자는 돌을 던져라”라는 말이고 다음은 “너부터 지금 여기서 이 여인처럼 죽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현실부터 챙기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현실이 극복될 때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스스로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편에서 서 계셨습니다.

 

2.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내는 삶

 

요즘 한국교회의 적패는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교회를 자기 소유의 기업으로 생각하는 사업적 발상과 교회라는 작은 왕국을 만들어 권세를 누리는 유일무이의 독재사상입니다.

 

그래서 "유명 목사" "인기 목사"라는 말이 나타났고 성도의 숫자에 따라서 목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고 있고 설교자들은 그 이름 앞에 교회의 이름이 먼저 들어가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이 강하게 거부했던 그 일들이 버젓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회와 대중은 개인 목사의 우상화라고까지 할 만큼, 인기스타처럼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등장하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마케팅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복음을 제치고 하나님을 제치고 홀로 찬사를 받으려는 부패한 인간의 야욕을 여지없이 보여 주는 단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반 성도들에게도 자신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성도의 내적 신앙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성도가 큰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더 작은 교회에 봉사하는 성도보다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허망한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가 하나님인지 목사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여러분, 이정도 만으로도 교회가 왜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지 알 수 있겠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는커녕 조그만 권위조차도 없음을 이해할 수 있겠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지금 교회의 안위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존폐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욕을 먹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시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인간들의 행태에 이해와 관용과 배려보다는 공격과 몰이해와 욕설로 다가가는 시대가 종식되어야 하는데 2018년도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체 2019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권위는 있고 없고로 나뉘는 세상의 힘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누는 배려의 힘이고 섬김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권위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이 권위로 무장하여 2019년도는 세상을 움직 일 수 있는 권위를 갖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