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신앙과 생활

조회 수 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도의 자태 Series 5 성결한 삶(마 5:27~33)

 

간음치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간음은 가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배우자 외의 다른 이성과 육체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계명을 보다 엄격하게 해석합니다. 구약에서는 간음치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에게 나는 말한다.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을 아름답게 하시려고 주신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데 대표적으로는 바로 이 말씀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분노는 참을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욕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 인격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욕은 다릅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은 행위로 채워줘야 만족하기 때문에 제어가 어려습니다. 더구나 현대는 식욕과 성욕을 부추기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기 아내나 남편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이성과 지내야 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쉽게 음란물에 노출이 됩니다. TV나 영상 매체들은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광고합니다. 요즘은 배후자에게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보다 타인들에게 그런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우리는 음란문화의 유혹을 피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마음속의 간음을 문제 삼으면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인류 역사상 가장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아씨시에 가면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는데 그 성당 뒤쪽에는 가시가 달리지 않은 장미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정욕을 이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프란치스코가 그 정욕을 이기기 위해 발가벗은 몸으로 이 장미꽃 정원을 뒹굴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온몸은 장미 가시가 박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 장미 정원에서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지금껏 자라고 있다는 전설입니다.

 

3세기에 기독교 최초로 애굽의 사막에서 고행을 하며 수도원 시대를 열었던 성 안토니라는 수도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에서 35년을 살았는데 내내 자기를 유혹하는 세력과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수도사들은 경건하게 평안한 맘으로 살고 있을 것 같지만 한쪽에서는 악한 생각이 일어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기도로 항거하며 처절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악마가 발가벗은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하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성자들이 당한 유혹이 이 정도인데 눈뜨면 보이는 것이 음란문화에 노출된 평범한 우리들이 당하는 유혹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1. 이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요구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사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라는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행동율법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5장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문제라고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속으로 온갖 추악한 생각을 다하면서도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위의 율법에 철저했기 때문에 실제로 간음을 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대신 남들의 죄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서 없이 잔혹하게 대했고 그것이 의를 나타내는 유일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란 것은 그냥 생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남용한 것이 5장 31절의 ‘이혼증서’입니다. 이혼증서는 원래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였습니다. 당시 힘이 없었던 여성들은 남편이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핑계를 대어 집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평생 재혼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합법적으로 이혼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혼증서 안에는 “내가 그대에게 이 이혼증서를 줌으로 그대의 행위의 자유를 주노니 그대가 원하는 자와 결혼해도 좋다”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이것을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때문에 간음은 할 수 없으니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쫓아낸 후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해서 주님은 사람의 불의한 의도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시는 것입니다. 행위의 간음도 문제지만 마음의 간음과 전통적 간음과 심지어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문화적 간음까지도 문제를 삼고 계신 것입니다.

 

2. 장기를 떼어 내야 하는가?

 

주님은 이 마음속의 음욕과 싸우기 위해서는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 프란치스꼬가 맨 몸으로 장미 가시 위를 뒹굴었듯이 그런 결연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예로 든 것이 바로 29절과 30절 말씀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정욕의 유혹은 눈으로부터 들어옵니다. 보지 않는 것이 유혹을 피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면 차라리 눈을 빼어 버리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손이 범죄 하게 만들죠. 그러면 그 손을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불구자가 될지언정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과장법입니다. 실제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죄의 유혹을 이기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한쪽 눈을 빼고 한쪽 팔을 자른다고 해서 음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의 악이란 것은 너무나 집요해서 그렇게 해서도 다 뽑히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 오리겐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주님은 따르는데 성욕이 방해가 된다하여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욕이 사라질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다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다 지옥불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질문에 직면학 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창기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 3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창기도 구원을 받았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기보다는 덜 음란한 여러분도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 또한 마음의 간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과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후자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음란한 세상 문화 속에 살면서 음란의 씨를 받은 우리는 결코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불순함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혀와 예수님 앞에 끌려나왔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음했던 남자는 어디로 갔나요. 여자만 끌어다 놓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자신들은 평생에 그런 잘못 한 번 저질러보지 않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다 사라지고 예수와 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이미 순결은 물 건너갔지만 앞으로 사람 앞에 정결하고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순결은 했지만 사람들 앞에 정결하지 못했고 하나님 앞에 성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은 인간의 순결이 아닌 정결과 성결입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3. 음욕과의 싸움

 

그러면 이 음란함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다음의 몇 가지를 실천해 봅시다.

 

첫째는 의미 없이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 커피 놔두고 아무 상관 없이 괜히 옆집 여자랑 커피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거대한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의 태도가 좋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자 요셉은 이 죄가 하나님께 짓는 죄임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리고는 그 여자와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창39:10)고 전합니다. 그 여자가 옷을 잡자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정욕의 문제는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상한 모임이나 술집, 좋지 않은 인터넷 사이트는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음란문화들을 추방하도록 해야 합니다. 보지 않으면 확실히 성적 욕구는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 몸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유혹은 한가할 때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좋습니다. 하나님과 묵상하는 시간 외에는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여가 선용이나 건강한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이 실패했던 때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다윗이 한가할 때였습니다. 사무엘 하 11장 2절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자기 군대는 암몬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는데 다윗은 저녁 늦게까지 낮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일어나서 한가하게 지붕을 거닐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정신이 덜 차려진 가운데 그만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일로 바쁘면 그만큼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힘쓰다 보면 그런 일이 멀어지게 됩니다. 몸이 부서질 만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일해 봅시다. 간음이 다 뭡니까?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셋째는 우리 성의 욕구가 제대로 분출될 수 있도록 도랑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인간의 모든 병의 근원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냥 누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결혼이고 건강한 부부입니다. 부부가 되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노력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준 관계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잠언서 5장 15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여기에서 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것을 비유합니다. 우리는 자기 우물의 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물은 시원하고 먹을 만큼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딴 우물을 기웃거립니다. 딴 우물을 취하는 것 이것은 자기 우물에 대한 배신이요 불의입니다. 자신의 우물을 복되게 하고 관리하고 즐겁게 하지 못하는 것 또한 불의입니다.

 

서양 속담에 “담장 이쪽에 있는 잔디가 더 푸르지 않다. 담장 저쪽에 있는 잔디 또한 더 푸르지 않다. 당신이 물주는 곳의 잔디가 더 푸른 법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우물을 개발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가능한 모든 일을 함께해야 합니다. 배후자의 부정은 일차적으로는 본인에게 있지만 이차적으로는 배우자에게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나 부모일지라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이나 일이 부부관계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신앙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부부관계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성적인 유혹이 올 때는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 나오는 드라마들이 불륜에 대한 문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타락했다고들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저는 아직까지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륜을 행한 자들의 뒤끝이 좋지 않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관계가 파괴됩니다. 부부관계 자녀 관계, 동료관계, 그리고 본인은 양심의 가책과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떠도는 뉴스에 보면 이러쿵저러쿵 벼라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정직한 사람들이 이기는 법입니다.

 

넷째,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부부들은 서로를 통해서 정욕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미혼인 젊은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가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빠라고 해서 교회오빠는 신선하고 착하고 뭐든지 잘해주는 선한 이미지였는제 지금의 교빠는 자칫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을 수 있는 겉으로는 과거의 선한 교빠지만 속에는 늑대 한 마리로 교회의 순진한 자매들을 희롱하는 위험한 존재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경 교육은 현실과 연결되어져 있어야합니다. 현실성이 없는 교회 교육은 언제나 사회문제의 맨 앞에서 허덕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청년들의 결혼이 자꾸 늦어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장 에너지가 넘칠 때 그것을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다 취직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자꾸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대리만족 시켜주는 음란문화가 발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유혹의 시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당연한 말씀과 기도의 무장이라는 것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인 것입니다.

 

말씀이 힘이 됩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연약할지라도 강력한 말씀의 힘이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지켜줍니다. 말씀이란 것은 언젠가는 계속 묵상하다보면 그것이 내 안에 인격화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만은 그보다 먼저 이성의 유혹이 먼저 우리의 삶을 앗아가 버립니다. 타이밍이 중요한데 교회는 언제나 한 박자 늦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교육은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 와중에도 교회 교육이 대안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미려하나마 그것조차 없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우리는 청년들의 성결을 위한 현실과 미래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어느 청소년 집회에서 청소년들의 성문제로 강의를 하다가 강사가 그 대안이란 것이 여성이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책가방이나 파우치에 반드시 콘돔을 소지해야 한다...라고 해서 큰 파문이 일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들었던 한 소녀가 집에가서 어머니께 콘돔을 사달라고한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청소년 집회를 참가하고 돌아온 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이것이 이번 집회의 가르침이 맞냐며 집회 운영자들에게 연락이 왔고 석연치 않은 답변에 실망한 그 어머니는 이후로 교회 교육에 불신을 안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강사는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성병이나 임신 등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을 막기 위한 예방책의 하나로 필요한 방법 중 하나로 그런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런 교육은 근본적으로 교회교육이 아니라고 판단한 부모들과의 괴리를 확인한 한 예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교육은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청소년 성교육에 목적을 갖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오늘 이 자리에서 해결할 사항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은 이런 문제들을 이미 제기하고 있고 이런 문제들을 수습하기 위해 의지를 갖고 노력들을 하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수도 없이 많이 촉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청년들은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37절 말씀도 좋습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37)

 

잠언 잠4:23에서도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

어느 두 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을 만났는데 어떤 한 여인이 물을 건너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승 된 스님이 그 여인을 업고 시냇물을 건넜습니다. 이를 지켜본 제자는 매우 의아해 했습니다. ‘어떻게 스님이 여인을 업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냇물을 건너서 길을 한참 가다가 그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속세를 떠난 중이 여인을 업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아까 그 연인을 등에서 내려놓았거늘, 넌 어찌 아직까지 등에 업고 있는 게냐?”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매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우정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성욕에 매인 부자유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성은 정상적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지으시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우정과 사랑을 누리도록 하셨으며 그것과 함께 의리와 도덕과 예절과 규범 등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성의 기쁨과 환희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나만의 성을 위해 규범을 넘어가는 것은 남의 아내를 겁탈하기 위해 혹은 남의 아내와 통간하기 위해 남의 집 담을 넘는 것과 같은 죄악입니다.

 

젊은이들도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 자유로운 간음을 허용받는 특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훗날 남의 아내, 남의 남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고 훗날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지켜주고 가꿔주고 위로해 주고 끌어주는 그런 형제 자매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숙했던 과거 때문에 순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정결과 성결로써 과거의 삶을 씻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