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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활

2015.10.25 10:14

다툼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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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과 화해

야 4:1-12

 

한 노르웨이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5560년 동안 역사에 흔적이 남은 전쟁이

만 사천 오백 삼십 한번(14,531) 있었고 이는 1년에 2.6회에 해당되는 숫자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전쟁에는 수많은 인명의 피해와 재산은 물론이고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인류의 상처를 남기게 된다.

 

결국 이 지구상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전쟁과 파괴로 이어지는 파멸과 상처로 얼룩진 깨진 지구의 종말일 뿐이다.

 

왜 이리 인간들은 다투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싸우며 그 싸움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도 수많은 전쟁의 기사가 나온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빚어지는 끊임없는 전쟁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1. 형제와의 싸움

 

시편 133편 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할 형제간의 사랑이 어둡고 우울한 비극적인 갈 등으로 빚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다.

 

이 일가친척 간과 형제간의 싸움은 최초 아담의 두 형제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후로 작은 아버지와 조카 사이였던 아브라함과 롯

형제지간이었던 에서와 야곱

부자지간이었던 다윗과 압살롬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던 유다와 다말

배 다른 형제 솔로몬과 아도니아 등

 

성경의 역사적 기록에서 보아도 이 전쟁과 다툼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도 네가 크냐 내가 크냐로 제자들을 다 투었고 사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등 수많은 당파들로 그들은 나뉘어 싸웠다.

 

2. 하나님과의 싸움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인간은 신의 뜻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신들은 인간을 통해 무언가를 충족해야 만 살 수 있다고 믿었기에 수많은 방 법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신을 위한 제사를 드려 왔다.

그래서 그러한 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하나님과의 갈등도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 연유에는 어떠한 일을 해도 무방하게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들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 했을 뿐이었다.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 니라”

 

세상의 어떤 신도 일단 비위만 맞추어 놓으면 그 누가 어떤 일을 해도 관심 없는 게 상 식 이었다.

그다지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관심 있는 신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이 쾌락을 위해 스스로 만든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유를 지으시고 모든 인간을 지은 신 하나님의 근본과는 이러한 신에 대한 사 상은 원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과 잘못된 인식 속에서 빚어진 하나님과의 싸움 후 찾아오는 세 가지가 있 는데

 

1)세상의 쾌락

2)육신의 정욕

3)마귀의 권세

 

여자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후 받은 고통이 자녀를 출산 할 때 마다 죽을 수 도 있는 엄청난 고통을 대가로 얻게 되었다.

그럼 남자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받은 죄의 대가는 무엇인줄 아는가?

감히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도전한 그 여자를 평생 섬기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무식한 말이다.

여자를 다스린다?

여자가 고분고분 들어준다고 그걸 정복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인식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소극적인 분이 아닙니다.

죄의 대가를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가늠하는 분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누구의 대가가 더 무서운가?

한 여인이 남편 때문에 평생을 구박받고 살았다고 슬퍼합니다.

아직 인생이 끝나지 않은 자의 노랫말이다.

아직 그녀는 1절 가사의 후렴이도 못 미치는 삶을 살았을 뿐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사에는 남자는 여자를 섬기고 살았다 로 끝나게 되어 있다.

 

3. 자기 자신과의 싸움

 

철학자 플라톤은 전쟁과 다툼의 근원은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라고 했다.

키에로케고르는 욕심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 라고 전제한 후 바로 그 욕심이 개인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나라를 망쳤다 고 했다.

에드워드 기본은 야망은 이간의 싸움의 본능을 충족시키지만 결국 그 야망으로 망한다.

 

결국 싸움과 전쟁은 형제 인척 간의 싸움이든 하나님과의 싸움이든 나라의 문제가 아니 고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가 아닌 한 개인의 욕심과 야망 때문이란 결론이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들이 개개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의 답은 교회와 교인으로 함축 된다.

 

과거 중세시대 하나님의 교회가 너무나 부귀와 권위와 명예만을 추구하는 귀족 종교로 치닫자 이에 지친 평민과 시민들의 맘속에 파고든 것이 바로 “우리(We are)”였다.

 

그 우리는 삶의 주소요 실존 그 자체였다.

 

그 우리는 바벨탑을 쌓을 때의 우리였으며

출애굽 할 때 모진 고난과 주린 배를 움켜쥐며 “왜 우리를 죽게하느냐 며 외쳤던 우리였고

바로 공산당이 생기게 된 근본 표제가 “우리”라는 것이다.

 

결국 그러나 그 우리로 인해 큰 분열이 생기고 큰 약점과 허점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우리라는 사상이 결국은 개인의 희생을 강제로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기쁨이 충만한 자는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무슨 역할이든지 다 수행할 수 있다.

내 잔이 넘쳐흐르는 자는 이웃의 마른 가슴을 적셔주고

그들의 허무해 갈라져 균열된 마음의 상처에 치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외로운 자들끼리 모여 만든 곳엔 기쁨이 없다

돈 없는 자들끼리 모여 만든 단체는 거지단체 일뿐 풍요로움을 기대 할 수 없다.

아무리 잘해 보자고 모여 봤댔자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모이면 그게 그거란 말이다

 

삶이 어렵고 바쁘다고 집에서는 남편과 아이들 따듯한 밥 한 끼 제대로 해 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와 서는 남들 먹으라고 밥해주는 그 맘은 돌아가면서 내가 미쳤지 하는 허무감이 밀려오고

생활비가 없어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며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며 아낀 돈 교회에 몽땅 바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내가 돌았지 라며 울고

일가친척 대소사에 늘 바쁘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못하고 늘 욕먹는 신세인데 일주일에 몇 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하는 이 참담함

 

이것이 바로 다 교회의 책임이다.

우리라는 억지가 개인의 환경과 처지를 무시하고 이렇게 하면 무조건 된다는 공산당 식 철학이 결국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젠 교회가 개개인을 돌아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처지와 형편과 입장을 쳐다보고 살피고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그러한 교회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중세시대의 교회처럼 잘못된 인식과 그릇 된 편견으로 개개인을 돌아보는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도의 본과 모습을 지녀야 한다.

 

1. 하나님께 순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웃을 섬기는 모습이다.

이것이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이다

 

2.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자

평화를 사랑하며 화평을 도모하는 것인데

평화는 둘 이상이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혼자는 그럴 듯한데 꼭 둘만 모이게 되면 문제를 야기 시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이다.

혼자는 괴롭고 외로웠다가도 둘 이상이면 화평과 사랑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 말하기를 성도들을 놓고

개개인을 보면 최고인데 함께 놓고 보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최고는 모래성이다.

금방 무너진다.

 

3. 겸손하며 이웃을 섬기자

회개는 해방이다

죄의 사슬과 압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진정 참된 자유의 삶은 바로 이 회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와 겸손은 쌍둥이 이다.

회개하는 이는 겸손하고 겸손한 자는 늘 회개하는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후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개개인의 상도들의 맘과 형편을 헤아릴 줄 알고 그들에게 우리의 순종하는 삶,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늘 회개하며 겸손히 사는 삶을 보며 주므로써 신앙의 귀감과 훌륭한 선배가 되어주므로 더 이상의 다툼과 싸움을 종식하는 교회가 되자.

 

상한 감정의 상흔이 치유되는 교회가 될망정 아픈 맘의 상처에 또 다른 고통을 주는 성도들이 되지 말자

 

내가 충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먼저 나부터 은혜중만, 성령 충만, 말씀 충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 시키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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